[스크랩] 제주전최(濟州殿最)와 제주사회(濟州射會)
10. 제주전최(濟州殿最)
숙종 28년(1702) 11월 17일 실시. 제주목사가 관하 각 관리의 치적(治績)을 심사하는 그림. 장소는 건물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帥’자 깃발 위치와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건물임을 볼 때 관덕정이다. 각 군대의 책임자 즉 당시 제주지방의 군대는 크게 속오군(束五軍)과 마대(馬隊)로 구분되는데, 속오군은 3부(部) 6사(司) 30초(肖)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부의 책임자 천총(千摠), 각 사의 책임자 파총(把摠), 각 초의 책임자 초관(肖官), 마대(馬隊, 말을 탄 군대)의 책임자 별장(別將), 각 진(9鎭)의 조방장(助防將), 성장(城將, 성정군의 장) 8명, 교련관(敎鍊官) 13명, 기패관(旗牌官) 94명, 도훈장(都訓長) 유학(幼學) 양유혁(梁維爀), 각면(各面) 훈장(訓長) 8명, 각면 교사장(敎射長) 22명, 강유(講儒,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 302명, 사원(射員) 322명이 당시 전최(殿最, 공적 심사)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濟州殿最와 濟州射會는 제목과 그림이 바뀌어 있다.
11. 제주사회(濟州射會)
숙종 28년(1702) 11월 18일 실시. 활쏘기 전에 관덕정 앞에 정렬해 있는 모습. 절제사 즉 제주목사, 중군 제주판관 이태현(李泰顯), 대정현감 최동제(崔東濟), 정의현감 박상하(朴尙夏)를 비롯해서 군관(軍官) 15員, 주무(州武, 제주목의 武出身) 23원, 각청의 관리들이 정렬해 있다.
관덕정은 28개의 민흘림기둥으로 떠받쳐진 단층누각이다. 본래 이 사장(射場)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세종30년(1448)에 목사 신숙청(辛淑晴)이 창건하였으며, ‘射者所以觀盛德也(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 하여 관덕(觀德)이라 이름하였다. 관덕정이란 현판은 처음에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썼다고 하나, 현재의 현판은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이다. 건물 안에 있는 '탐라형승(耽羅形勝)'은 1780년 김영수 방어사가 쓴 것이며 ‘湖南第一亭’은 제주목사 박선양이 1882년에 쓴 것이다. 1900년초까지만 해도 좌우의 처마를 받치는 첨주가 있었으나 일본인들이 처마를 잘라 버렸으며 문을 달기도 했었다.
내부 두 개의 대들보에 가로 650cm, 세로 50cm의 작자와 연대 미상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즉 홍문연(鴻門宴), 두보취과양주귤만헌(杜甫醉過楊州橘滿軒), 상산사호(商山四皓, 네 신선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나무꾼과 옆에서 낮잠을 자는 신선의 그림),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이 그것이다.
제주읍성의 관아건물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즉 관덕정 북쪽으로 우연당(友蓮堂), 영청(營廳), 상아(上衙), 망경루(望京樓)가 보이며, 이들 건물로 드나들기 위한 외대문(外大門), 중대문(中大門), 내대문(內大門), 후문(後門)이 차례로 나타나 있으며, 애매헌(愛梅軒), 군관청(軍官廳), 군기고(軍器庫) 등도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관덕정 동남쪽으로는 제주판관과 관련된 관아건물인 관청(官廳), 목관(牧官), 목관으로 통하는 외대문, 내대문, 군관청(軍官廳), 민가(民家)의 모습이 표시되어 있다.
* 홍문연(鴻門宴) : 홍문연은 항우와 유방이 자웅을 겨루던 시절 항우가 유방을 산시성 홍문으로 초대해 베푼 연회를 뜻한다. 겉모습만 연회지 실제론 항우의 책략가 범증이 유방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함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