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 목축업 3. 수산업
2. 목축업
상고 시대 이래로 탐라에서는 소, 돼지 등을 가축으로 키워 왔으나 목장을 설치하여 전업으로 목양을 시작한 것은 고려 후기부터였다. 원은 탐라를 점령한 후 충렬왕 2년(1276)에 소, 말, 양 등을 방목한 이래 산야를 분할하여 목장을 설치하고 단사관이나 만호를 두어 이를 주관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후일 제주도가 國馬 생산지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며 탐라 목축업에 있어서 획기적 전환기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원 내정간섭기의 제주도 목장 참조)
3. 수 산 업 제주도에서의 고대 어업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충분치 못하나, 고려시대의 어업을 전하는 기록으로는 《고려도경》,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이 있다. 이들 기록을 통하여 당시 제주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어업이 행하여지고 있었음을 추찰할 수 있다.
첫째는 잠녀(잠수, 해녀)에 의한 어업의 형태이다. 《高麗史》충렬왕 2년 6월 임신조와 《東國與地勝覽》제주목 토산조에 의하면「嬪珠高麗忠烈王二年 元遣林惟幹採珠于耽羅不得及取民所藏百余枚以還」이라 하여 珠를 嬪珠(전복진주)라 했다. 이는 즉 진주를 비롯한 각종 해조물의 채취가 다른 방법보다도 연안의 얕은 바다에서 잠수에 의한 것이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는 낚시 어구를 사용한 어업의 형태이다. 제주도의 연해는 일반적으로 평탄하여 굴곡이 적고, 바람의 영향으로 파도가 많으며, 또 조용한 內灣이 없기 때문에 육지부에서 널리 행하여졌던 網漁業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셋째는 石防簾에 의한 어업(垣防漁業)의 형태이다. 현재 본도 연안의 얕은 바다 일부에는 원담(터)이라는 곳이 있다. 해변의 일정한 구역에 돌담을 쌓아 놓고 밀물따라 몰려든 고기떼들을 썰물이 나면 그 안에 가둬 놓아 쉽게 잡을 수 있도록 장치해 둔 곳을 ‘원’ 또는 ‘개’라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파도가 많지 않은 해안에 돌담을 쌓아 만조시에 멸치, 고등어 등의 漁群이 들어와 그 중 일부가 간조시 빠져나가지 못하고 석방렴 내에 남아 있던 것을 포획했다.”고 한다. 이것은 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고려 때부터의 것으로 추측되나 원담(터)이라는 유물적 근거를 뒷받침할 만한 사적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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