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큰동산 역사뜨락/제주도 향토사

제1절 군현 설치 이전의 탐라(4)-탐라인의 벼슬

제주큰동산 2007. 11. 7. 21:37
 

 8. 탐라인의 士宦(벼슬)


  고려시대 관리 등용 방법으로는 科擧와 文蔭(음서제도)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기록상 과거를 거쳐 벼슬한 탐라인으로는 高維가 처음이었다.

《東文選》에 실려있는 <星主高氏家傳>에 의하면 “高維가 처음 賓貢에 합격하여 靖王(靖宗) 11년(1045)에 南省試에 장원하였고, 이듬해인 병술년에 禮部試 합격하였으며, 벼슬이 우복야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宋史》高麗傳에 의하면 “고려의 貢士(1차 합격자)는 세 부류가 있는데 王城의 경우를 上貢이라 하고, 군읍의 경우는 鄕貢이라 하며, 타국인의 경우를 賓貢이라 한다.” 여기서 빈공이란 외국인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한 것을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 사람들이 이에 응하였다. 따라서 高維가 빈공으로써 남성시에 급제하였음을 보면, 빈공은 성주를 중심으로 藩國(반독립적 왕국)을 유지했던 탐라의 왕족들에게 일반 군현의 鄕貢과는 달리 특혜를 베푼 특수한 鄕貢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과거에 급제한 사실과 관련하여 탐라인으로서 고려조에 벼슬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고 유(高 維)  : 성주 高末老의 아들로서 최초로 중앙에 진출한 인물이다.

 고려 현종때 崔沖의 문하에서 師事하여 정종 11년(1045)에 南省試에 급제하였고, 문종 11년(1057)에 秘書少監으로 입조한 후 병부시랑, 우복야에 이르렀다.

고조기(高兆基) : 고유의 아들로 최충이 개설한 9재 학당에서 수학하고 예종 2년(1107)에 약관 19세로 문과에 급제한 후 남쪽 지방에 나아가 고을을 다스릴 때는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고 많은 옛 서적을 섭렵하고 역사를 연구하여 깊은 학문을 쌓았다. 한 때는 탐라 성주로 있다가 인종 7년(1129)에 侍御使가되어 조정의 기강을 세우는데 진력하였다. 인종 8년(1130)에 賀節使로 金나라에 다녀왔고, 李資謙의 무리들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工部員外郞(工部의 정6품 벼슬)에 좌천되었으나 얼마 후 다시 복귀한 후 조정의 잘못을 들어 상소를 거듭하므로 예부낭중으로 전직되었고, 인종 13년(1135) 묘청의 난 때 金富軾의 보좌관으로 활약한 바 있으며, 1148년(의종 2년)에는 知貢擧를 역임하였고, 1149년(의종 3년)에는 政堂文學 參知政事가 되었다가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특히 五言詩에 능하여 시집 3권을 저술하였다 하나 珍島江亭 등 6수만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제주시 아라동 2464번지에 있는 그의 묘역은 제주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38호로 지정되었다.

고 적(高 適) : 高挺益의 아들로 원종 2년(126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

려 원종의 부름을 받고 성주 및 靑州從事官으로 두 번이나 몽고에 다녀왔다. 충렬왕 2년(1276)에는 탐라에 돌아와 留摠官이 되어 삼별초의 난 이후의 민심 안정에 노력하였다.


  이렇게 과거를 통하여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됨에 따라 탐라의 土姓인 高氏도 중앙과 지방 토착 세력으로 분화해 갔으며, 이러한 경향은 탐라 토성인 梁氏와 夫氏도 시대의 전후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된다.


 ● 참고문헌

① 許興植,  <選擧志選場의 分析-高麗禮部試登科錄의 作成과 관련하여 

   ->,『高麗科擧制度史硏究』,  一潮閣 , 1984 , p. 250 .

② 康錫奎 , <耽羅-近代의 濟州鄕土敎育 >『康錫奎停年退任 記念論文』 

   , 全南大學校 出版部 , 1994 .

③ 濟州道, 『濟州道誌』第一卷, 1993. 

④ 濟州道, 『濟州道誌』上, 19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