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군현시대의 탐라(2) - 군현의 설치 과정과 탐라현의 편제
1. 군현의 설치와 편제
가. 군현의 설치 과정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은 성종 때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여 그 후 여러 번 개폐 과정을 거쳐 현종 9년에 정비를 보게 되었다. 이 때 전국적으로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아니었고 중요한 지역에서부터 파견되었다.
제주도의 경우 《고려사》지리지 탐라현조에 의하면 숙종 10년(1105) “탁라를 고쳐 탐라군으로 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반독립국으로서 고려조의 간접 통치(형식적인 지배)를 받아 오던 것이 숙종 10년에 이르러 비로소 지방 행정 구역으로 편제되고, 또 그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음을 의
미한다.
이로써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탐라국은 해체되고 高麗의 일개 郡으로 편제되어 경래관(京來官)에 의하여 통치되었고 성주와 왕자는 정치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성주·왕자의 작위는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어 탐라의 상징으로 그 권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와 관련하여 비록 탐라군으로 되어 지방 행정구역에 편입은 되었지만 이에 따른 후속 조치로써 의종 16년(1162) 최척경이 부임하기 이전까지 수령이 파견된 기록이 없으므로 그때까지는 편제상 탐라군으로 두었을 뿐 행정적인 면에서는 성주에게 일임되어 자치적 경향이 강했다는 주장도 있다.
탐라군은 설치 48년 만인 의종 7년(1153) 경에 이르러 郡에서 縣으로 강등되어 현령관이 파견되었고 속관으로서 지방민으로 戶長 이하의 향직을 두어 실제의 지방 행정을 보조하도록 하였다. 고려시대의 군과 현은 5도의 장관인 안찰사 등 상급 관청으로부터 공히 명령을 하달 받아 소관 지역을 관할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나, 단지 여기에 파견되는 지방관의 품계에 있어서 郡에는 지사(5품관), 현에는 현령(7품관)이 파견되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등은 취락의 크기, 인구 수, 토지 결(結) 수의 다과에 따라 결정이 되지만 일정한 상례는 없었다. 가끔 특정 인물의 관향이나 전공, 반란지의 회유책의 일환으로 상위의 행정 구역으로 승격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모반인의 관향일 때는 도리어 강등되는 경우도 있었다.
탐라가 현으로 격하된 이유는 군이 설치된 숙종 10년으로부터 의종 때 현으로 강등될 때까지 그간의 사정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유로 “주, 군, 현의 등급은 그 지방에 민란 또는 반란의 유무에 따라 격하되고 승격된다”는 중국의 古例에 따라 실시된 일시적인 행정 조치로 보면서 1153년을 전후하여 탐라에서 민란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는 주장도 있다.
고종대로 넘어 가면서 令이나 尉 대신에 副使나 判官이라는 관명이 보이는 바, 《제주도지》에 의하면 이를 고종대에 와서 탐라가 현에서 다시 군으로 승격된 뒤에 濟州로 개편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부사와 판관은 군 이상의 행정 단위에 파견되는 관직이라는 점과, 《高麗史》五行志에서도 고종 7년(1220) 3월에 ‘耽羅郡’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縣에서 郡으로 승격되면서 그에 상응하는 관리가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려사》고종 16년(1229) 2월조에 ‘濟州’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탐라가 郡에서 다시 州로 승격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① 濟州道, 『濟州道誌』第一卷, 1993.
② 耽羅星主遺事編纂委員會, 『耽羅星主遺事』, 1979.
③ 金宗業 , 『耽羅文化史』, 조약돌, 1986.
④ 金宗業, <自治的 경향의 高麗前期>,『제주향토무크』I, 濟州歷史硏究
會, 1989,
나. 탐라현의 편제
제주가 탐라군으로 편제된 후 고려 의종 7년(1153) 탐라군은 현으로 강등되었다. 현이 처음 설치된 의종 때에 縣村의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한 수효를 알 수 없으나 아마 당시에는 여러 개의 현촌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사》지리지 탐라현조에「희종 7년(1211) 현내의 석천촌을 귀덕현으로 승격하였다.」고 한 것처럼 원래 자연촌락이던 부락이 屬縣의 성격을 갖는 행정 단위로 발전해 갔다. 그리고 《탐라지》에서는 「대촌에는 호장 3인, 성상 1인, 중촌에는 호장 2인, 소촌에는 호장 1인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도지》에 의하면 충렬왕 26년(1300)에 설치된 현촌(屬縣)을 貴日, 高內, 涯月, 郭支, 貴德, 明月, 新村, 咸德, 金寧, 狐村, 烘爐, 猊來, 山房, 遮歸,兎山 등 모두 15개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현의 증가는 그 지방의 번영을 의미하는 것도 되지만, 그와는 반대로 관아가 증가함에 따른 곤혹도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지방관의 파견 유무에 따라 주현과 속현의 두 가지로 구분하여 속현의 경우는 지방관이 배치된 주현에 예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주도에 편제되었던 15개 현촌은 주현인 탐라현(현재 제주시인 대촌현)의 관할 하에 있었던 속현이며, 이들을 크게 대·중·소로 나누고 호장 등의 향직을 두어서 관리하였다.
● 참고문헌
① 濟州道, 『濟州道誌』第一卷, 1993.
② 陳祝三(吳富尹 譯), <蒙元과 濟州馬>, 『耽羅文化』第8號, 濟州大學校
耽羅文化硏究所, 1989
③ 濟州道, 『濟州道誌』第二卷, 1993.
④ 高昌錫, <耽羅의 郡縣設置에 대한 考察-高麗前期를 中心으로->,『濟州
大學校論文集』17,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