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절 元 내정 간섭기의 탐라 - 머리말
제4절 元 내정 간섭기의 탐라
삼별초군이 여·원 연합군에 의하여 討平된 이후 원의 초토사(招討司)와 군민도달로화적총관부(軍民都達魯花赤總管府)가 제주에 설치되면서 탐라 성주는 하나의 허수아비에 불과하였으며, 탐라를 원에 예속시키는 한편 몽고마 160필을 수산평에 방목시키는 등 목양지와 병참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고려 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충렬왕 20년(1294)에 제주는 다시 고려에 환속되면서 제주(濟州)로 복호되었으나 원의 세력은 그대로 잔존하였으며 구실이 생길 때마다 원에 예속 또는 고려 환부 등을 반복하였다. 근 1세기 동안에 걸친 원의 지배는 공민왕 23년(1374)에 최영의 목호 토벌로 인하여 본도에서의 원의 지배는 종식되고 고려로 완전히 환부되었다.
삼별초의 항쟁 이래 1백여 년에 걸친 원의 제주 지배는 종결되었으나 1세기동안 원 제국의 문화가 제주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문화의 영향은 목축에 대한 다양한 기술은 물론, 원의 불교가 유입되어 불사, 원당, 신당 등이 무수히 창건되었는데 수정사, 원당사, 법화사 등은 元에 의하여 창건된 사찰로서 제주의 불교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또 이들 사상이 토착의 사신(
蛇神) 숭배 또는 산신할망 숭배와도 혼합되어 오늘날 그 유풍이 곳곳에 남아 있는 제주 특유의 종교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원의 목자들은 제주도가 원의 복속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고려 말까지 남아 자주 난을 일으켰는데 최영이 대군을 이끌고 토벌해야 할 정도로 그 세력이 강대하였으니 이들과의 결혼 및 결연을 통한 몽고 습속의 전염은 본토의 어느 지방보다도 지대하여 제주도의 언어와 습속에 혼합되어 오늘날의 제주 방언에도 몽고어의 흔적이 있고 풍속에도 몽고풍이 남아 있다.
元 지배에서 벗어나자 중앙에서는 목사와 판관을 두고 그 지배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충렬왕 26년(1300)에는 촌락을 대·중·소로 나누고 호장(戶長)·성상(城上) 등을 둠으로써 성주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충렬왕 27년(1301)에 元은 다시 군관총관부(軍管總管府)를 두었다가 곧 만호부(萬戶府)로 개설하더니 공민왕 16년(1367)에 이를 다시 고려에 환속시켰다. 이후 공민왕 21년과 23년에 元 목자들이 난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곧 평정되었고 뒤이어 고려의 멸망과 함께 조선으로 이속되게 되었다.
● 참고문헌
① 陳祝三(吳富尹 譯), <蒙元과 濟州馬>,『耽羅文化』第8號, 濟州大學校
耽羅文化硏究所, 1989 .
② 濟州大學校, 『鄕土文化史(敎材用)』, 1984.
③ 韓榮國, <濟州道의 名勝과 古蹟-附錄 濟州道의 歷史>,『濟州道史硏究
』第3輯,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