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큰동산 역사뜨락/한국근현대사

[스크랩] 이광수와 신채호 -친일의 논리와 그 문제

제주큰동산 2007. 8. 8. 11:11

[친일의 논리와 그 문제]

 

 

‘친일’ 에 관한 지식인들의 변절의 역사는 2년 전 한국사 수업에서도 한번 다룬 적이 있다. 이 수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바로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 살아갈 때 지식인에게는 반드시 수반되는 의무가 있다.” 는 말이었다. 그 시대 가장 영민한 재능으로, 남들을 압도할 정도의 뛰어난 실력으로 시대를 영도했던 지식인들의 책무는 그만큼 막중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들의 ‘친일’ 은 더욱 실망스러울 뿐이다.

 

 

우리는 이광수와 단재 신채호의 삶과 역사 인식을 비교하며 ‘친일의 논리’ 에 직면한 두 지식인의 극명한 대립을 마주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천재’ 라고 불리던 이광수가 그 유명한 <민족개조론> 으로 변절의 길을 걸어간 것은 그 당시 지식인의 몰락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 하는 이유로 ‘조선 민족의 내부적 원인’ 을 들었고 민족의 쇠퇴성, 치명적 결함, 문화의 뒤떨어짐 등 갖가지 이유를 내밀면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옹호했다.

 

 

당시의 시대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속에서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하는 지식인의 위치에서 그의 식민지배 옹호는 분명 지식인의 의무를 망각한 책임 회피였다. 개인적으로 춘원의 민족 개조론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모든 책임을 조선 내부에게 돌림으로써 민족성을 폄하하고 그것을 도덕성에 연관시켜 식민 지배를 합리화 시키는 아주 지능적이고 악질적인 글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대단한 ‘필력’ 으로 그 누구도 혹 하게 할 정도의 일장 연설의 글을 써 내려갔지만 결국 <민족개조론> 의 목적은 민족의 독립과 맞바꾼,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다. 다행인 것은 이광수가 걸은 친일과 변절의 길 반대편에 단재 신채호라는 걸출한 역사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단재는 풍부한 사료와 깊고 넓은 역사 인식을 통해 춘원의 <민족개조론> 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민족의 주체성, 자주성, 뛰어남을 강조했다.

 

 

그는 춘원과는 달리 식민 지배를 열렬히 비판하고 그것을 시대 상황과 일본이라는 외부적 요인에서 찾음으로써 일반 민중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단재는 그 시대 지식인으로서 요구 받은 소명에 누구보다 충실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저 일신의 안위를 위해 <민족개조론> 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역사에 수치스러운 발자취를 남긴 춘원과는 본질적으로 비교가 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그 시대 지식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이 요구받았던 사명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분명 일반 민중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심어주고 그것을 통해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일제의 논리에 가담하고 변절의 길을 걸음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것은 그들 뿐 아니라 일반 민중, 더 나아가 지금의 우리 그리고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 속에서 가정이라는 것은 부질없는 일에 지나지 않지만 만약 춘원이, 미당이 친일이 아닌 영원한 ‘독립투사’ 로 남았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분명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춘원과 단재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감으로써 우리는 역사 속에서 뼈아픈 교훈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극명하게 갈린 삶의 방향성에서 우리는 진정한 진리와 삶의 추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 바로 지식인의 삶이다.”  춘원과 단재의 ‘앎’ 과 ‘삶’ 속에서 모쪼록 우리 모두 지식인의 ‘앎’ 과 '삶‘ 의 일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출처 : 이광수와 신채호 -친일의 논리와 그 문제
글쓴이 : 승복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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