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큰동산 역사뜨락/한국근현대사

근대의 최초의 일과 사건들...

제주큰동산 2007. 10. 16. 23:36
 

최초의 일과 사건


  최초의 자전거(1895) - 서재필(사람들은 그를 미국에서 축지술을 배워온 서양 축지술의 명수라고 생각)


  최초 이발소(1901) - 인사동 동흥이발소 유양호씨(머리를 서구식으로 잘라주거나 상투도 짜주고 면도로 머리를 밀어주기도 함)


  손탁호텔커피숍(1898)


  우편엽서(1900) - 대한제국 전환국, 인쇄국 한 장 가격 1전, 체면을 중시하는 조선인에게 손바닥만한 우편엽서가 너무 체신 머리 없게 보여져 인기가 없었다한다.


  당시 집배원 : 체부라고 부름. 생소한 복장을 하고 이집 저집 기웃거리니까 사람들에게 도둑으로 오인을 받거나 개에게 물리는 경우가 많았다. 더 어려운 점은 바로 주소를 찾는 일이였는데 주소가 재밌는 '이 편지를 경북, 저 경자가 서울 경자거든요, 그러니까 서울 북쪽 우편엽서 장동 자수궁 다리에 가서 안 네거리 최홍규 홍서시댁에 전하시오' 이게 주소. 당시 사람들은 주소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주소를 애매하게 적었는데, 그래도 그 주소로 어김없이 배달이 됐다고 한다. 조선 체부의 우편배달이 워낙 정확해서 일본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이렇게 우편배달이 정확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각 우체사마다 태형틀을 비치해 두고, 편지를 잘 못 배달했을 때 엄한 징계를 가했는데, 대한 제국 관보를 보면 '배달을 하면서 수고비를 요구한 자' '편지를 잘못 보내거나 배달하지 않은 자' '잘못 배달된 우편물을 이유없이 우체부로 돌려 주지 않은 자' 등을 곤장 40대에 처한다고 기록.


  우리나라 최초의 개그맨 - 그 주인공은 바로 윤부길이다. 1915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윤부길은 본래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였다. 그의 희극적 끼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41년 라미라 가극단의 멤버가 되면서부터. 최초의 뮤지컬 <콩쥐팥쥐>에서 윤부길은 '소' 역할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1947년 그의 천재적 끼와 소질은 부길부길쇼에서 정점을 이룬다. 윤부길은 여기서 무대장치, 쇼 연출, 대본 등, 혼자서 일인 다역을 감당해 내며 초호화 무대를 관객에게 선보였다. 또한 그는 종로 텔레비젼의 OB쇼, KPK악단의 뮤지컬 쇼 등 무대를 누비며 자신의 천부적 재능을 발휘한다. 딸은 윤복희.


  1920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에는 재미있는 광고가 실렸다. 당시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결혼청첩을 신문에 게재한 것이다. - 신문에 광고까지 낸 이 떠들썩한 결혼식의 주인공은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과 변호사 김우영. 당대를 대표하던 두지식인의 결혼은 곧 장안의 화제가 됐다. 특히 나혜석이 내세운 결혼조건은 사람들을 더욱 당혹케 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노모와 전실 자식과는 따로 살 것, 신혼여행을 자신의 죽은 애인 묘지로 갈 것.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개화꾼', 유행을 좇느라 서양 것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들은 '얼개화꾼'이라 불렸다. 사회 곳곳에 '신여성'들이 등장하고, '신학문'이 유행하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동경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1899년 5월 1일자 독립신문에는 재밌는 기사가 실렸다. 통역관을 길러내던 관립 외국어 학교의 연합운동회가 개최된 것. 훈련원에서 개최된 이 운동회는 남녀노소 수만 명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이 운동회의 최대하일라이트는 바로 당나귀경주였다. 당나귀 경주에 대한 기록은 그 전해인 1898년 5월에도 볼 수 있다.

  "훈련원 대청에서 만국기로 단장하고 중앙에 대한 국기를 높이 세운 채 진행된 외국어 학교 운동회는 대성황을 이뤘다. 이날 당나귀 대회 1등을 차지한 한어학도 조중완은 상으로 책상을 받았고, 2등은 수첩, 3등은 연필을 각각 상으로 받았다. "

경마가 없던 그 시절, 외국인 교사들은 자기네 나라의 경마를 본 따 이 당나귀 경주를 만든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 마사회에서는 이 경기를 우리 경마 역사의 효시로 보고 있다. 그 10년 후 경마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관중은 매회 인산인해를 이루어 경마대회를 위한 특별열차까지 배정할 정도다.


  활동사진을 처음 대한 한국인들은 그 기묘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01년 9월 14일자 황성신문에는 활동사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논설이 실렸다. "이런 귀신의 조화 속 같은 물건은 천고에 보도 듣도 못한 것이니, 우리는 언제 이런 묘술을 배워 익히게 될지 모르겠구나." 그 후, 미국인 콜브란은 정부의 허가를 얻어 동대문 안, 전기회사 창고에 최초의 영화관이라 할 수 있는 광무대를 열었고, 황성신문에 광고를 실었다. 일요일과 비오는 날은 제외하고 매일 저녁마다 활동사진을 상영했다고 기록돼 있다. 광무대에서 상영되던 활동사진은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외국인들이 강에서 스케이트 타는 것을 구경하려고 1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심지어 그 소식을 들은 왕비는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궁중연못에서 타게 했다. 궁중의 작은 연못 한가운데는 섬이 있고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왕과 왕비가 발을 치고 내시들과 함께 구경했다고 한다.

  민비가 서양인들이 테니스 치는 것을 구경하면서, 저렇게 힘든 것을 하인들을 시킬 것이지 왜 힘들여서 자신이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


  독일에서 온 헤쎄 바르텍의 눈에 조선 남자들은 대단한 골초로 보였다는데. 긴 곰방대를 어느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담배를 입에서 떼는 것이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 사람들, 담배 많이 피워요. 이 나라 사람들이 뿜어대는 담배연기면, 독일 사람들은 이미, 모두 질식해서 죽었을 꺼예요."


  유럽의 한 일간지에 장난기 어린 웃음의 고종황제 삽화와 총명하고 어진 왕이라는 기사가 실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문이었는지 통신 기자로 파견된 독일인 지그프리드 겐테에 의하면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게 유럽 아가씨들로부터 편지가 쇄도했다고 한다.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고종 황제의 비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기녀들 같이 여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기생들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점잖은 멋을 풍긴다고 한다. 또 서양식 군복 역시 일본인 보다는 한국인들에게 더 잘 어울려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다. (1901년 지그프리드 겐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