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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심쩍은 "안중근(응칠) 역사"에 대하여

제주큰동산 2008. 5. 12. 10:36

최두한 칼럼

미심쩍은 "안응칠 역사"에 대하여

안응칠은 안중근 의사다. 누구 한 사람 모르고 있는 사람이야 없을 것이다.
<안응칠 역사>는 바로 <안중근 의사 자서전>이다. 그것은 안중근이 옥중에서 집필한 것이라고 하다. 다음은 그 책을 1979년 9월에 번역한 노산 이은상의 발간사의 내용에서부터 먼저 문제점을 제기한다.

"안의사가 1909년 10월 26일(음력 9월 14일) 상오 9시반, 하르빈 역두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 이또우 히로부미)을 저격한 후, 여순(旅順)감옥에 수감되어 계시던 동안, 그해 12월 13일(음력 11월 초1일)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910년 순국하시기 10일전인 3월 15일(음력 2월 초5일)에 탈고한 것이므로, 무릇 93일 동안 집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있어서는 그 원고가 세상에 나타날 수도 없었던 것이요, 해방후에 있어서도 그 원고의 내용을 알 길이 없었읍니다.
그러나다 지난 1969년 겨울, 일본 동경 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의 손에 의하여, 그것의 일본어 번역 프린트본이 발견되어 우리에게 전해졌고, 이듬해(1970년)에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한 일이 있읍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사의 원고원본이 아니요, 일본어로 번역되고, 또 그것을 우리글로 거듭 번역하는 동안, 저절로 그 글 속에 석연치 않은 곳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연히 의사의 원본이 어디서고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고, 또 반드시 나타나지고야 말 것을 믿고 있기로 했읍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에게 또 한번의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읍니다. 일본 장기시(長崎市: 나가사끼)에 주소를 둔, 도변장사랑(渡邊庄四郞: 와다나베 쇼시로우; 금융업주)씨가 보관해왔던 것인데, 그가 그같이 귀중한 문헌을 1979년 2월에 우리 주일대사관을 통하여 우리에게 기증해준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읍니다.
그러나 실물을 보니, 유감스럽게도 그 역시 안의사의 친필원고가 아니요, 그 당시 일본인 누군가가 그 우너본을 등초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읍니다. 더구나 이번에 발견한 순한무본과 일본어 번역본을 서로 비교해본 바, 일본어 번역본에는 누락된 것과 오역된 것이 상당히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읍니다."

여기서 이 발간ㅅ의 글대로 이해하면, 그 말대로 문제가 6가지 발견된다.
첫째, 지금까지 알려진 안중근 의사의 옥중친필자서전으로 알려진 "안응칠 역사"는 안중근 의사가 직접 슨 원본의 글과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현재까지 알려진 "안응칠 역사"는 일본인에 의해 등초된 것, 즉 일본인이 그들의 의도대로 작성된 글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1979년 9월 현재까지 "안응칠 역사"라는 안중근 의사의 육필원본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넷째, 일본인에 의해 쓰여진 "안응칠 역사"일지라도 1969년 겨울까지 대한민국 사람들은 알 길이 없었고, 전혀 알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다섯째, "안응칠 역사"가 친필원본은 아니지만, 1979년 2월에 주일대사관을 통하여 일본 나가사끼시에 살던 도변장사랑에 의해 기증받은 것인데, 그 글은 순한문이라는 것이다.
여섯째, 두 가지의 "안응칠 역사" 즉 일본어 번역본과 순한문본 사이에는 결국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단지 누락된 것, 오역된 것이라 하여 순한문본의 가치를 더 부여했다는 것이 좀 더 다르다. 이것은 어딘가 있을 친필 순한문본의 존재를 시사한 것이며, 그 친필본이 순한문본임을 시사한 것일 뿐 아니라, 안중근은 대한독립군이요, 애국자임에도 한글이 아닌 순한문을 썼다는 것이다.

노산 이은상은 이어서 "물론 안의사의 친필원본은 이디고 일제의 비밀한 문서 궤짝 속에 깊숙히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그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고 했으면서도 너무도 세밀한 곳, "일제의 비밀한 문서 궤짝 속"이라고까지 표현했다. 혹시 노산 이은상은 그 원본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친필/육필원본인 순한문의 "안응칠 역사"가 나타날 때에 밝혀질 일이다.
그렇다면 진작 "안응칠 역사"의 내용에는 무슨 문제나 의문 나는 점은 없을까?
첫째, 년도를 서력기원, 즉 서기를 썼다. 그가 태어난 해가 1879년 을묘 7월 16일이라든지, 1884년 갑신, 1894년 갑오, 1905년 12월, 1910년 경술 음2월 초5일 양3월 15일 려순 옥중이라는 것들이다. 물론 1896년 11얼 17일을 서기 1897년 1월 1일로 쓴다고 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둘째, 태어난 고을은 말했으면서도 진작 자기가 태어난 고향마을은 밝히지 않았다. 즉, "大韓國 黃海道海州府首陽山下"라고 했으며, 7살에 이사한 곳이 "信川郡淸溪洞山中"이라고 했다.
셋째, 1884년 갑신년 사이에 "朴泳孝氏"라는 호칭의 문제다. 이때는 박영효(1861-1939년)는 24살의 한성판윤이었다. 그 박영효는 끝내는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이었고, 일본에 망명한 사람이었지만, 그 당시는 애국청년 70명을 유학시키려 했고, 자신의 부친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어 애국자로 평가하고 있었다. 안중근 자신보다 19살이나 많은 한성판윤이었던 애국적 지식인이라고 본 박영효란 인물을 그저 "박영효씨"라고 표현한 것은 안중근 본인의 의지로 쓴 글이 아님을 말해준다. 적어도 "한성판윤 박영효" 또는 "한성 박판윤"이라고 했을 것이다.
넷째, "東學黨之暴行 東學黨魁首元容日" "敵兵/亂黨"이라고 하면서 동학당을 나쁘게 표현하고 있어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에 기록된 동학당 역할과는 대조적이다. 백범과 안중근은 나이가 3살 차이뿐이다.
다섯째, "京城/漢城府"가 서로 다른 의미로 쓰였다.
여섯째, "現聞淸國山東上海等地 韓人多數居留云 我之一般家眷移接於該處 然後以圖先後方策若何"(현재 들으면 청나라 산동/상해 등지에 한국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하니, 우리 집안도 모두 그곳으로 옮겨가 살다가 선후 방책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안중근 부자간에 했던 말인데, 산동/상해가 어딘데 이사를 이웃 동네로 가는 것처럼 소식을 듣고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일곱째, "我卽地發程 遊歷山東等地 後到于上海訪閔泳翼"(나는 곧 길을 떠나 산동 등지를 두루 다녀본 뒤에, 상해에 이르러 민영익을 찾아나섰다.)
이 민영익(1860-1914년)은 갑신정변때 자객의 습격을 받았으나, 죽음을 면햇고, 그 뒤 병조판서/한성판윤을 지냈으며, 이조/형조/예조판서와 판돈녕부사 등을 거쳐, 1898년 찬정(贊政)으로서 보국(輔國)에 올랐고, 1905년 러일전쟁 후에 상해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왜 하필이면 무슨 목적으로, 무슨 일로 민영익이 상해로 갔는가? 무엇 때문에 안중은을 민영익이 만나주지 않았는가?
여덟째, 1905년 12월에 상해에서 진남포로 돌아왔다. 안중근은 이등박문의 강화5조약을 맺은 뒤에 상해도 갔다. 겨우 몇 달만에 왕래한 것이다. 가까운 곳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배로 왕래했다면 그런 사실이 적혀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도 않다.
아홉째, 그의 행로를 보면, 상해(上海)-진남포(鎭南浦)-청계동(淸溪洞)-진남포-평양(平壤)-백두산 서북간도(西北墾島)-러시아령토 연추(烟秋)-해삼해위(海參威)-두만강(豆滿江)-강동(江東)-연추방면-해삼위-하발포(河發浦)방면-흑룡강상류-수청(水淸)-연추방면-목구항(穆口港)-합이빈(哈爾賓)-수분하(綏芬河)-장춘(長春: 가지는 않음)-합이빈 이다. 이런 지명들은 <지도>나,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곳은 산서성의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내몽고 호화호특과 집녕(集寧)에까지 이르는 과정으로 보인다. 만주(滿洲) 하이빈, 즉 하얼빈이란 곧 이 근처일 것이다. 좀더 연구해야 ㅎㄹ 부분이다.
열째, 시간의 표시를 "上午九點半頃也" 등등 時를 點으로 표현함으로써 현대중국어법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중국어식 표현이요, 한문이지, 한국식 표현은 아니다.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이것은 생활의 습관/관습에서 비롯되므로, 한반도의 언어관습은 아니다. 바로 중국대륙이라는 조선의 관습적 언어였다.

지금 대한민국에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을 것이다. 독립기념관 건립위원장 안춘생(安椿生)씨는 안의사의 5촌조카라고 했다. 버마 대사를 역임한 안진생(安珍生)도 가까운 친조카라고 하는데, 안의사는 생전에 2남1녀를 두었을 뿐이다.장남은 일찍 죽었고, 차남인 안준생, 직계 손자 안웅호(安雄浩: 미국거주)가 있다. 안준생씨는 두살 때에 부친 안중근이 순국했으므로 1908년생이다. 그는 6.25가 난 뒤에 부산 앞바다의 덴마크 병원선에서 사망했다. 부인은 김 마리아다.
그리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후손들, 서재필 박사의 자제분들도 한결같이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살고 있다. 애국심이 없지는 않을 텐데 왜 그들은 모두 대한민국에 살지 않을까? 아니 왜 버렸을까?
김영광(金永光)의 번역서 <일본 지성인이 본 안중근>(경운출판사, p.229)에서 "무엇인가 독립유공자들의 후손들에 대한 정부 당국의 자세에 문제점이 있거나, 그분들에게 지나친 중압감을 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러한 왜곡을 빚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소감을 열거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글에 다른 견해를 갖는다. 김영관씨는 이 한반도 사람이고, 아중근/안창호/서재필 등은 본디 중국대륙(=본디 조선)의 ㅅ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안중근 의사의 며느리요, 그 아들 안준생의 부인이요, 안웅호의 모친인 鄭인모 여사는 상해호강대학을 졸업했다고(위의 책, p.230) 했으니, 정여사 또한 절강성 상해 사람이었다. 안웅호씨가 "그는 모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고 하는 김영광의 체험담은 그가 한반도에서 태어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는 중국대륙이라는 본디 조선에서 태어나서 살았고, 이내 미국에서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중근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가 순한문으로 적힐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반도 황해도 해주부 사람이었음에도 한문공부를 많이 하여 순한문으로 자서전을 쓴 것이 아니라, 그는 중국대륙 산서성 남서쪽 평양부 해주(解州) 수양산(뢰수산: 수산) 아래에서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순한문 자서전 작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안중근의 자서전과 그의 행적으로써 조선의 단면으로써 전체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인 단적인 예이다.

 
안중근 의사가 상해 및 지부에 간 목적은?
나는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이 대한민국에 많이 있을 줄로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지금은 그의 직계 후손은 대한민국에는 살고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일본인에게서 제1회 신문조서가 끝나고 보름이 지난서 피고인(安應七: 안중근)에 대한 제2회 신문조서(1909년 11월 14일; 관동도독부 감옥서)에서 이런 문답이 있었다.

문: 그대는 五歲와 二歲의 子息이 있는가.
답: 五歲의 子息은 있어도 나는 三年 以前에 집을 나왔으니까 二歲의 兒孩는 모른다.

여기서 안중근에겐 아들 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맏이는 5살이었으니 1904년생이고, 하나는 2살이었으니 1908년생이다. 바로 이 후자가 안준생(安俊生)이다. 그 아들이 미국에 살고 있는 안웅호(安雄浩)씨다. 그분이나마 편안하게 사시도록 더 이상 캐묻고 싶지 않다. 단지 그 직계후손이 한반도에는 살고 잇지 않다는 것만을 알고자 했을 뿐이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는 위의 신문조서에서, 또 <안응칠 역사>에서 중국에 갔다는 내용에 대해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한 말이 있다.

문: 그대는 上海 및 芝부(그물망四 아래 不)에 갔었는가.
답: 只今으로부터 五年前에 갔었다.
문: 同所에는 무슨 일로 갔었는가.
답: 遊覽次 갔었다.

여기서 안중근은 우리가 통상 말하는 중국에 간 적이 있으며, 그것도 강소성 상해와 산동성 지부에 갔었으며, 그것인 시기가 5년전이라면 적어도 1904년 이전이 된다. 그런데 <안응칠 역사>에서는 진남포에서 강소성 상해로 갔다는 기록에는 p.99에는 1905년이다. 이미 1년전부터 중국땅에 있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본디 조선)이라는 그곳에 살고 있었던 사람이라야 가능한 말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 간 목적이 유람차 갔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안도 진남포에서 유람하러 강소성 상해와 산동성 지부로 여행을 갔다는 것이다. 통 큰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쉽게 갈 수 있었던 그 평안도 진남포는 한반도가 아닌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조선독립운동을 했었는데, 1904년 이전에 중국에 유람이나 했을까? 일본인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행동으로 보아 단순한 유람은 아닌 것이다. 그것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유람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의 유람이었으며, 조선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한문실력에 대하여

<안중근 의사 자서전>이 곧 <안응칠 역사>이다. 이 글은 "안중근의 옥중집필"이라고 했는데, 그 글은 "순한문"이다.
여기서는 안중근 의사가 쓴 글이 "순한문"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안중근 의사가 한문을 썼다고 해서 그의 실력을 낮추어본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 글에서 보이는 뭔가를 찾아보면 약간의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순한문본이 친필원본이 발견되어야 사실여부를 정확히 알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친필원고에 의해 일본인 누군가에 의해 등초된 것이라고 했으므로, 그것에 의해 그대로 신뢰한다는 전제하에 안중근 의사의 한문실력 파악하고자 한다.
<안중근 의사 공판기>피고인(安應七) 제1회 신문조서"(p.244)에 보면, "關東都督府地方法院"에서 1909년 10월 30일 哈爾賓 日本帝國總領事館에서 檢察官의 조서를 받았는데, 이렇다.

문: 그대는 韓國에서 官吏 또는 其他 公職에 就職한 일이 있는가.
답: 全然없다.
문: 그대는 學問을 배웠는가.
답: 배우지 않았다.
문: 文字(=漢字)를 아는가.
답: 조금 안다.
문: 文字는 어디서 배웠는가.
답: 별로 배우지 않았다. 다만 新聞 等에서 自然히 알아졌다.

이 문답의 내용으로 보면, 안중근 의사는 한문을 배운 적이 없으며 스스로 깨우쳤다는 것이다. 그것도 신문 등으로 본 것 뿐이다. 이 정도면 천재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에는 단 한 줄도 예외없이 한문이다. 그것도 매우 잘 쓴 문장이다.
그 사람이 한반도 사람이었다면, 31살이 되기까지 보았던 신문, 혹시 한반도 간행의 신문을 보고서 그런 한문 문장을 유창하게 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중국대륙에서 자라고, 그곳에서 살면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이토오 히로부미의 범죄상을 고발하기 위하여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조선의 영웅이다.
그러면 그가 보았던 신문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런 신문으로 그토록 훌륭한 한문의 자서전을 쓸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자.

문: 그대는 韓國의 過去/現在/將來에 關하여 政治上의 思想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他人으로부터 들은 것인가. 또는 新聞에 의해서 안 것인가.
답: 他人으로부터 들은 것은 아니다. 韓國에서 發行한 大韓每日新聞/帝國新聞, 美國에서 發行하는 共立新聞, 또 浦潮에서 發行하는 大東共報 等의 論說을 읽고 위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장 많이 읽은 것은 大韓每日新聞으로 其他 若干있다.
문: 右新聞은 어느 때부터 읽고 있었나.
답: 五/六年前 또는 三/四年前부터 新聞이 손에 들어옴에 따라 읽고 있었다. 繼續閱讀하고 있지는 않았다.
문: 그 新聞은 어디서 어떠한 機會에 읽었는가.
답: 韓國에는 어디고 있는 新聞이니까 별로 場所도 一定치 않고, 또 機會란 것도 없다.

안중근 의사는 신문을 접해본 것이 오래 되어야 5/6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짧게는 3/4년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4년 안팎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안중근 의사는 한문을 깨우치고 지식을 쌓았다는 매체가 신문을 통해서였다고 했다. 이 정도의 기간으로써 훌륭한 한문작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신문들이 몇 가지 되지 않는다. 그런 신문들이 곧 중국대륙에서 간행된 것임도 그의 한문을 배운 계기/기회/기간 등으로써 알 수 있다. 더구나 浦潮는 어디며 大東共報는 어떤 성격의 신문인가? 결국 안중근 의사는 한반도와는 관련이 없는 조선애국자였다. "浦潮"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신문조서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문: 어느날 富寧에서 出發하였는가.
답: 나는 義兵이라 晝間은 街道通行이 아니 되므로, 韓曆(1909년) 八月 晦日(그믐)에 出發, 山中을 거쳐 慶興으로 나와 그로부터 露領 '포셋트'라고 하는 곳에서 汽船을 타고 浦潮로 왔다.

여기서 "浦潮"는 벌써 러시아 령토(領土)임을 알 수 있다. 이 글로 보면, 안중근 의사의 행적은 부녕(富寧)-경흥(慶興)-포셋트(馬口威)-포조(浦潮)-하얼빈(哈爾賓)이다. 역시 이런 신문들은 한반도에서는 구해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젊은 나이, 짧은 기간에 순한문 자서전을 93일만에 완성하였던 것은 안중근 의사 자신이 한반도와는 상관이 없는 곳에서 태어난 것이며, 그곳이 중국대륙이고 그곳에서 살며 조선의 애국행동을 했던 영웅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한문과의 생활습관에 젖어있었던 터에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 짧은 단순한 사건으로 조선/대한제국의 위치가 중국대륙임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출생지 - 고향에 대하여

우리는 애국지사 안중근 의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들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의 말을 좀더 신뢰성을 갖도록 하는 말 가운데는 일본인 中野泰雄이 지은 <일본의 지성이 본 安重根> 金永光 옮김, (慶雲出版社, 1984, p.236)에 이런 표현을 한 것이 있다.

"安의사의 行蹟과 生涯, 그리고 사상 등에 대해서 우리는 많이 알고 있는 듯 하지만, 기실 그렇지 못한 실정인 것이다. 특히 安의사의 저격으로부터 재판, 그리고 수감생활과 집행에 이르기까지의 행적에 관해서는 우리보다는 일본인들이 더 소상히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글로 김영광씨가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인식을 술회한 것에서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더 든다. 그러나 어찌 이뿐이랴! 우리는 사실 그의 출생지부터 알지못하는 것을!
<<안중근 의사 자서전>>(안중근 의사 숭모회, 1979, p.17)이라는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에는 안중근 자신이 그 자신이 태어난 사실을 언급해놓았다.

"1879년 기묘 7월 16일 대한국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한 남아가 태어나니, 성은 안이요, 이름은 중근, 자는 응칠이라 하였다."

이 표현은 안중근 자신이 썼다는 표현으로 보기에는 미심쩍다. 자신을 제3자로 보고 쓴 글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글을 안의사 자신이 썼다고 인정하고, 다음 글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안중근 의사 공판기에 보면, 피고인(安應七) 제1회 신문조서(訊問調書)에서 질문과 답변하는 내용에는 전혀 다르다.

"住所는 韓國平安道平壤城外. 本籍地는 同所, 出生地는 同所."(<안중근의사 자서전>, 안중근 의사 숭모회, 1979. p.244)

위의 두 자료의 내용에는 안중근 의사의 출생지에 대해 행정구역을 보면, 황해도와 평안도, 해주부와 평양, 수양산 아래와 성외(城外)라고 하여 전혀 다른 말을 하였다. 이 두 가지의 지명에서 어느 한가지는 거짓일 것이다. 거짓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 행정구역의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출생지가 어느 것이 맞는지도 모르는데, 어찌 그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백과사전><인물사전>에 모두 안의사는 "황해도 해주" 출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인의 신문조서에 답할 때에 안중근 의사가 거짓말을 했겠는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의 출생지는 어디가 옳다는 말인가? 안의사가 조서받으면서 말했던 "평안도 평양성외"라는 말도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서성 서남부 평양부(平陽府) 해주(解州) 수양산(首陽山: 雷首山)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곳이 평양(平壤: 平陽) 성외(城外)가 되고, 수양산하(首陽山下)가 된다. 이것은 백범 김구와 같은 경우이다. 김구와 안중근은 3살차이뿐이다.
어찌 안중근 자신이 일본인에게 이런 출생지 같은 것을 거짓으로 말함으로써 쓸데없는 불신을 받으려고 했겠는가?
나는 일단 한 치의 거짓없는 진술이라고 볼 때, 자신의 출생지는 산서성 서남부 평양부(平陽府) 해주(解州) 수양산(首陽山) 아래[下]가 된다. 그곳이 곧 황해도(黃海道) 해주부(海州府)이기도 하다. 그 지역을 때에 따라 도(道)의 개념이 바꾸어불렸던 것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박은식(朴殷植)의 저서 <박은식전서>中에 적힌 인물고(人物考)에는 "安重根傳"이 있다.

"安重根은 韓國黃海道海州人이라. 海州는 背(북쪽)에 首山을 負하고, 前(남쪽)에 大海를 臨하여 一都會가 된다. 高麗時에 州人 崔沖, ... 本朝名儒李珥는 州西石潭에 卜居하였으니, 其山水를 愛함이라."(p.568)

여기서 석담(石潭)은 <신증 동국여지승람>권42 장련현(長連縣)에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있다.

"구월산(九月山 중턱에 있으며, ... 네모가 방정하고, 너비가 6자이며, 물 깊이를 알 수 없다. 가물때나 장마져도 언제나 한결같다.(石潭在九月山腰 ... 四陽方正廣六尺 水深不測 旱료(僚의 人변 대신에 삼水변)如一)"

이 구월산은 아사달산(阿斯達山)/궁홀산(弓忽山)/증산(甑山)/삼위산(三危山)이라고도 하며, 장련현 남쪽 10리에, 문화현 서쪽 10리에, 은률현 동쪽 10리에 있다고 했다. 이 설명은 곧 구월산을 중심으로 동쪽엔 문화현, 북쪽엔 장련현, 서쪽엔 은률현이 있다는 말이다.
또 이 은률현에 있다는 구월산 허리(=중턱)에는 고요연(高腰淵)이 있다고 했는데, 그 형상이 가마와 같으며, 그 전설이나, 설명이 석담(石潭)과도 같다.
그런데 진작 한반도 황해도에 구월산을 중심으로 지명들을 살펴보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구월산은 해발 954m이며, 위치는 북위 38도30분, 동경 125도 15분에 있다. 이 산은 동쪽의 안악군과 서쪽의 은률군의 경계에 있고, 이 산을 중심으로 북쪽에 은률군, 북북쪽에 은률군의 관할이면서 이도면을 너머 장련면이 있고, 남쪽에는 안악군 서부 끝의 용진면/산천면/문무면을 거쳐야 문화면이 있다. 행정구역배치가 제대로 맞지 앟다는 말이다.
게다가 막상 해주에는 구월산이 아니고, 수양산(해발 899m)이 있으며, 위치는 북위 38도05분, 동경 125도44분이다. 이것은 박은식의 설명과도 다르다.
이 아사달 구월산은 단군임금이 말년에 신선이 되었다는 산인데, 수양산과 멀지 않는 곳에 있다는 말이며, 그것은 같은 하나의 산맥에 있음도 알 수 있다. 그것은 해주(海州 = 解州)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으며, 북쪽의 수산(首山)이란 그 산은 중조산(中條山), 즉 중조산맥인데, 수양산(首陽山)은 하곡(河曲)인 영제(永濟)쪽의 뢰수산(雷首山)이고, 구월산(九月山)은 그 동쪽에 있는 구봉산(九峰山)이며, 남쪽으로 대해(大海)란 바로 황하를 말한다.
이렇게 박은식의 "안중근전"에서 그의 출생지에 관한 설명으로 찾으면, 바로 그곳이 평양성밖(平壤城外)이며, 바로 이런 것은 중원(中原)이란 특성에서 기인하며, 다른 이름으로 중국(中國)이요, 경기요, 기내요, 관내요, 관중이며, 신주(神州)이기 때문이며, 이곳에서 8도(八道)와 직접 통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이런 사실은 한반도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지리적 관계이다. 그래서 지리적 특성을 잘 살펴봐야 한다.

출처 : 미심쩍은 "안중근(응칠) 역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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