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광개토왕" 릉이 우리 모테이에 있다구?
아! "고구려"
화진포 거북섬이 광개토대왕능이라는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고구려 연대기가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화진포 해수욕장에서 본 전경
지금까지 광개토대왕능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호태왕릉을 광개토대왕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고구려 연대기에는 광개토대왕3년(서기394년) 8월경 화진포의 거북섬에 왕릉(壽陵) 축조를 시작했으며, 광개토대왕 18년 8월에 화진포의 수릉축조 현장을 대왕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이듬해인 장수왕 2년(서기414년) 9월 29일 화진포 거북섬에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안장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곳에 광개토대왕능수비대가 왕릉을 지키고 있었고, 계림(신라)의 군사와 수비대의 잦은 분쟁이 있었던 것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문자명왕2년에 이곳에서 광개토대왕의 망제(望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바다 동북쪽애서 본 전경
또한 고구려 연구가 오종철씨의 저서 ‘다시찾은 고구려정사(正史)’‘고구려본기 신주해(하)’에서 “○○忽“이라는 지명은 고구려의 왕릉 또는 왕비능이 있는 지명이라고 밝히고 이를 근거로 고구려 왕릉을 직접 확인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
이 지방의 옛 지명인 ‘가라홀(加羅忽, 加阿忽)’,‘달홀(達忽)’에는 왕릉이 있고, 그곳이 바로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산1번지 거북섬(金龜島)이라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 양호하게 남아있는 석성의 잔해는 능의 보호벽(城)과 방파성(防波城)의 흔적이며, 산정부근의 와편과 주초석의 잔해는 능의 사당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일성 별장에서 본 전경
화진포 거북섬의 광개토대왕능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몽의 건국기와 광개토대왕비문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거북이의 도움으로 큰 강을 건너 고구려 건국의 동력이 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어 거북이는 일종의 고구려 수호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을 전연(前燕)에 빼앗겼다가 다시 찾아와 백천과 신계에 왕릉을 구축하고 그 곳에 부왕의 시신을 다시 모시고 자신의 수릉도 만들게 되면서 반도 내에서 왕릉길지를 찾고 보호하는 것이 고구려 왕의 중요한 역사(役事)로 인식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 역시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제도를 재정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즉위 3년에 반도내 길지에 수능(壽陵)의 축조를 시작했고,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이듬해 장수왕2년에 화진포 거북섬에 안장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초도항에서 본 전경
2000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행한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에는 화진포 거북섬을 금구도성지(高城金龜島城址)로 표시하고 있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초도고성(草島古城)'으로도 명기되어 있다고 한다. 『일제 때의 조사자료인<<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현내면 초도리 국유 초도리 마을의 동방 약 이백간(368m)의 해상 금구도에 있다. 연장 약백이십간(218m) 대부분 토축 불완전'이라 되어 있다. 이 조사에서 확인한 성의 구조는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섬의 정상부인 약 45m 높이의 고지를 중심에 두고 해안선의 자연 지형을 따라 화강암을 이용 석축으로 축조하고, 성벽 상단은 삭토하여 환도를 개설한 흔적이 200여m 가량 뚜렷이 남아 있다. 이와 연하는 북쪽의 암석 저지대는 잔돌끼움 쌓기의 협축법으로 석축한 불연속의 (추정)외성이 3개 구간에 남아 있다. 현재 잔존하여 있는 길이는 약 60m, 높이 170~230㎝, 협축벽간 거리 약 350㎝이다. 해송의 군락이 있는 부근에서 확인된 건물지(建物址)는 전죽이 우거져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으나, 건물의 주초석(50cm× 50cm)과 기와편, 토기편들이 확인되었다. 유물 및 성벽의 축조기법으로 보아 북방 세력의 남하, 빈번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열산현(烈山縣)의 수성처(守城處)로 추정된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석성의 외벽이 육지를 향하고 있어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라는 것 보다는 내륙 침입자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석성으로 보는 것이 옳다.
고구려사 연구의 새로운 계기가 될 이와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학계와 문화재 전문가의 정확한 유적조사와 고증을 통해 화진포 거북섬(金龜島)을 광개토대왕능으로 사적지화하고 성역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