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려공양왕릉
고려시대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왕비 순비의 능은 말이 왕릉이지 어느 몰락한 양반집 묘만도 못하게 작고 옹색한모습이더군요. 조선 태종 16년에 공양군에서 공양왕으로 추존되어 왕릉도 다시 개축한 것인데도 조선왕릉에서 흔히 볼수 있는 홍살문, 정자각 같은것이 없고 풍파에 심하게 마모가 되어 버린 비석은 그저 둥글고 뭉툭한 돌덩어리로 보일뿐 두 봉분 중간에 조선 고종때 세운 '고려공양왕고릉' 이라 새긴 비가 왕릉 임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고려왕릉의 석물과 양식이 왜소하고 소박하기는 하나 아무리 망한 나라의 임금이지만 임금의 무덤이 있고 그 바로 위에 다른 사람(정씨, 신씨집안)의 묘가 있다는게 아상합니다.
공양왕릉앞에는 개모양을 한석수가 있고 무덤앞에는 연못하나가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쫒겨나 개성을 빠져 도망을 다니던 중 고양땅으로 오게 되었는데 날은 저물고 지금의 고양시 식사동에서 노숙을 하다 멀리서 불빛이 보여 찾아가 보니 작은 절이 있더랍니다. 하지만 이절의 스님은 쫓기는 옛 왕을 도와주다가 변을 당할까봐 공양왕에게 "저희 절은 인적이 번잡하여 모시기 어려우니 이곳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누각에 가 계시면 매일 음식을 갖다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답니다.
그 누각이 있는 곳이 지금의 원당 다락골인데 왕은 절에서 날라온 음식으로 목숨을 연명하였다네요. 그래서 이 곳을 식사동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하구요.
얼마후 왕의 친족들이 공양왕의 행방을 찾아 다니던 중 이 곳 다락골 일대를 뒤졌으나 왕을 찾을길 없었는데 평소에 왕이 귀여워 하던 삽살개가 연못을 향해 짖다가 연못속으로 뛰어 들어 빠져 죽더랍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사람들이 연못의 물을 모두 펴내니 왕과 왕비가 같이 죽어 있었답니다.
친족들은 왕의 시신을 연못뒤 야산에 묻었는데 이후부터 이 마을을 다락골에서 왕릉골로 부르게 되었고 공양왕릉 앞에 개모양의 석상이 있게 되었다 합니다.
삼척에도 공양왕릉이 있는데 공양왕이 삼척에서 죽임을 당하고 목을 잘라다 보이고 목만 이 곳에 묻었다는 설도 있구요......
망한 나라의 역사는 왜곡되고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아 왜 두 곳에 무덤이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네요.
붉은 울타리속의 능이 공양왕과 왕비순비의 능 그리고 그 뒤는 정씨와 신씨의 집안의 묘
바로 앞에 움푹 파인곳이 전설의 연못이고 멀리서 바라 보이는 능이 공양왕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