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몽골의 부흥과 달라이 라마
칭기즈칸 후예, 티베트 불교와 손잡고 부활의 기도
군주권 강화와 분열된 부족민 규합 위해 정신적 지주 필요
티베트 겔룩파 수장을 달라이 라마로 추대하고 불교 확대 정책
남북종단 불교 벨트 형성, 이슬람 세력 저지용 방벽 역할
몽골·티베트 막강 커넥션 과시하며 정치·군사적 영향력 행사
1368년 여름, 지난 1세기 동안 중국을 지배하던 몽골제국은 마침내 그 최후를 맞이하였다. 주원장(朱元璋)이 이끄는 25만명의 반란군이 곧 수도로 진입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는 급하게 북쪽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수도인 대도(大都·현재의 베이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북구(古北口)라는 곳을 지나면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 그의 눈에는 저 멀리 대도의 모습이 뽀얀 안개 속에 아스라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순간 도읍지를 잃은 설움이 밀려들면서 사태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가슴을 치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갖가지 보석으로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완성된 나의 대도여!…
따스하고 아름다운 나의 대도여!
붉은 토끼띠의 해에 잃어버린
나의 가련한 대도.
이른 아침 높은 곳에 오르면 보이던
너의 아름다운 연무(煙霧).
나는 울면서 떠날 수밖에 없었노라.…
아홉 가지 보석으로 완성된
나의 대도성이여.…
내가 겨울을 보냈던 나의 가련한 대도,
이제 중국인이 모두 차지했구나.
토곤 테무르는 몽골 황제들의 여름수도가 있던 상도(上都)로 향했으나 애통한 마음으로 화병을 얻었는지 그곳에서 곧 사망하고 말았고, 그를 호종(護從)하던 비빈과 귀족들은 뒤이어 추격해온 명나라 군대에 졸지에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인지 황태자만은 용케 탈출에 성공해 고비사막을 넘어서 북방의 광활한 초원으로 가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도모하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토곤 테무르와 고려 여인 기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유시리다라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몽골인들은 중국을 상실하고 초원에 남아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지만 황제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대신 유목민 집단을 지휘하던 수령들이 발호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실력자들은 타이시(tayisi·太師)라는 칭호를 내세운 채, 허울뿐인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1388년 칭기즈칸의 적통을 잇는 황제마저 피살된 뒤, 몽골인들은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서로 대립했을 뿐만 아니라 각각 그 안에서도 서로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금씨족이라고 불리던 칭기즈칸 일족의 권위는 거의 불가침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막강한 권신들조차 스스로 칸(khan)을 칭하지는 못했고 명목상일지언정 칭기즈칸의 후손을 칸으로 세울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 17세기 후반에 나온 에르데니인 톱치(일명 몽골원류)라는 책에 기록된 토곤 테무르의 비가(悲歌).
아무튼 우리는 이제까지 14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를 설명할 때 중국인의 관점을 아주 충실하게 반영해왔다. 즉 몽골인들이 중국에 세운 원나라는 1368년에 망하고 그 후 그들은 분열과 혼란 속에서 침체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칭기즈칸과 쿠빌라이로 상징되는 대몽골의 영광은 마침내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몽골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한문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몽골어로 된 자료를 읽어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우리가 막연히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도 무비판적으로 계속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우선 당시의 몽골인들은 몽골제국이 중국의 한 왕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물론 가장 중요한 부분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제국의 일부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은 중국인이 만리장성 이남을 다시 빼앗았다고 해서 그것을 곧 제국의 멸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영토가 축소된 것뿐이었다. 토곤 테무르의 비가(悲歌)를 가만히 읽어보면 그것은 망국의 설움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가꾸어온 두 수도 즉 시원하고 멋진 개평 상도와 따스하고 아름다운 대도를 상실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몽골어로 된 연대기들은 1368년을 분수령으로 황통이 끊어지고 제국의 명맥이 단절된 것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몽골인이 전과 같은 기세를 상실하고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는 1410년부터 1424년까지 전후 5차례에 걸쳐 매번 50만명이라는 엄청난 군사를 동원하면서 대원정을 감행했지만 끝내 몽골의 위협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오히려 영락제의 과도한 정책으로 인해 중국은 재정적으로 피폐하게 되었고 몽골은 오히려 더욱 군사화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449년에는 중국의 황제가 에센(Esen)에게 포로로 잡히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역사상 토목보(土木堡)의 변(變)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당시 명나라의 군사적 무력성을 그대로 잘 드러내준다.
1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부족 수령의 발호로 인해서 약화되었던 칸의 권력이 다시 회복되고 강화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특히 1488년 바투 뭉케라는 인물이 즉위하면서 중앙집권화는 가속화되었다. 그는 재위 37년 동안 고비사막의 남북에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을 통합한 뒤 휘하의 유목민을 모두 6개의 만호(萬戶)로 재편하고 그것을 자식들에게 분봉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몽골 유목민에 대한 칭기즈칸 일족의 지배권이 다시 확립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다얀 칸(Dayan Khan)이라고 불렀는데 다얀은 바로 대원(大元)이라는 발음을 옮긴 것이니,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한 쿠빌라이 제국의 부활이 바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임을 분명히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어서 16세기 전반과 중반에 활동한 알탄 칸(Altan Khan)이라는 인물은 명나라 북변(北邊)에 대해 끊임없는 약탈과 공격을 가했는데, 한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1542년 38개 주현(州縣)을 공격해 20여만명을 살육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550년에는 토곤 테무르가 쫓겨갔던 바로 그 고북구를 통해서 남하해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포위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를 두고 경술지변(庚戌之變)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흔히 보는 북경 외곽의 엄청난 만리장성도 바로 이처럼 계속되는 몽골의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축성된 것이었다.
15~16세기 몽골인들이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만 활발했던 것은 아니다. 다얀 칸의 노력으로 초원 각지에 흩어져 있는 부족 수령들의 세력을 누르고 정치적 통합을 이룩한 칭기즈칸 일족은 유목민의 고질적인 분열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을 통합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인 지주 혹은 이념 같은 것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던져준 것이 바로 티베트 불교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578년 알탄 칸과 제3대 달라이 라마와의 만남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원래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7세기경이었고 송첸 감포(620~649년)나 티송 데첸(775~797년)과 같은 군주들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크게 융성했으나 9세기에 접어들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1세기 중반 인도의 고승 아티샤의 도래와 함께 다시 흥륭했고, 14세기에는 기존의 모든 경전과 논설을 번역한 칸주르(Kanjur)와 탄주르(Tanjur)가 완성되고, 각 사원과 스승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종파가 형성되었다.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총카파(1357~1419년)에 의해 개창된 겔룩파(Gelugpa)라는 개혁교단이었는데, 황모파(黃帽派)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 교단은 느슨해진 사원과 승려의 규율을 강화하고 지니치게 밀교적인 해석을 경계하였다. 1578년 티베트 고원 북부에 위치한 청해(靑海) 부근에서 알탄 칸과 만난 달라이 라마는 바로 이 겔룩파 교단의 수장이었다. 그의 본명은 소남 갸초. 겔룩파의 교세가 빠른 속도로 신장되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도 확실한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소남 갸초는 알탄 칸과 같은 강력한 세속군주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알탄 칸 역시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군주권을 강화하고 분열적인 부족장들을 규합하기 위한 이념을 필요로 했다. 청해에서의 회견은 바로 이 두 사람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알탄 칸은 소남 갸초에게 몽골어로 바다와 같이 넓다는 의미를 지닌 달라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었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잘 아는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라마라는 말은 스승을 뜻하는 티베트어이다. 소남 갸초는 자기에 앞선 두 명의 스승에게 동일한 칭호를 추존했고 자신은 제3대가 되었다. 달라이 라마라는 지위의 계승은 불교의 전생(轉生)이라는 교리를 전제로 가능한 것이니, 윤회를 거듭하는 다른 모든 생명처럼 달라이 라마도 죽으면 새 생명을 입어 어린아이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생존해 있는 14대 달라이 라마는 소남 갸초의 11번째 환생인 셈이다. 아무튼 1578년 이후 몽골 유목민 사회는 빠른 속도로 티베트 불교로 개종해갔다. 물론 불교는 그 전에 전래되었고 군주들의 보호를 받으며 육성되긴 했지만 16세기 후반 이후 비로소 거의 모든 몽골인이 불교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1585년에는 과거 몽골제국의 수도가 있던 카라코룸에 에르데니 조(Erdeni Dzo)라는 거대한 사원이 건설되었다. 17세기 중반에는 동서 몽골의 대표적인 수령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열어, 몽골의 모든 귀족가문이 적어도 아들 하나는 라마승으로 출가시키기로 합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변화는 몽골인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티베트에서도 겔룩파는 다른 교단을 누르고 절대적 우위를 확보했다. 16세기 후반에 일어난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먼저 유라시아 대륙 중앙부의 몽골 초원에서 티베트 고원으로, 즉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는 거대한 불교 벨트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이슬람 세력의 동방 진출을 저지하는 방벽 역할을 하면서 이슬람이 몽골과 만주 지방으로 확산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한 가지 의미는 몽골·티베트 커넥션의 형성이다. 이 커넥션의 초보적인 형태는 이미 몽골제국이 출현한 13세기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뒤 사실상 명맥조차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이제 칭기즈칸 일족의 정치·군사적 후원으로 겔룩파의 헤게모니와 달라이 라마 제도가 확립되면서 이 커넥션은 그들에게 통합력을 가져다 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유라시아에서 다른 어떤 민족도 넘보기 힘든 막강한 정치·군사·종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제국을 건설한 만주족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도 바로 어떻게 하면 이 거대한 커넥션을 끊느냐 하는 것이었다. 청제국이 마주해야 했던 도전인 셈이다. 그러나 청제국은 그 도전을 극복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보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바로 그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
토목보의 변 에센은 원래 서몽골에 속하는 부족의 수령이었는데 동서 몽골 전체를 통합한 뒤 중국 북변에 대한 약탈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1449년 여름 산서성 대동(大同)이라는 곳을 공격했고 이에 맞서서 명나라 조정은 대군을 파견하였다. 당시 군사적인 지식이 거의 없던 왕진(王振)이라는 환관의 부추김을 받아 직접 군대를 지휘하고 나선 정통제(正統帝)는 거짓으로 도주하던 에센을 추격하러 가다가 오히려 역습을 받아 토목보(土木堡)라는 곳에서 포위되어 생포되고 말았다. 에센조차 기대치 않던 놀라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는 중국 측으로부터 거대한 보상을 기대하고 협상을 벌였으나 명나라 조정은 정통제의 동생을 황제로 앉히고 오히려 협상 자체를 거부하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말하자면 대어를 낚아놓고 입맛만 다신 채 젓가락도 대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국 에센은 별다른 대가도 받지 못한 채 정통제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외교적 실책으로 인해 가뜩이나 불만에 차 있던 몽골인들은 에센이 칭기즈칸의 후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칸을 칭하자 그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를 축출해버렸다. 중국의 황제를 생포한 에센이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몰락을 자초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아니할 수 없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hdkim@snu.ac.kr
《14대 달라이 라마의 삶》
티베트인의 의식 중 가장 특이한 것은 그들의 죽음을 치르는 의식이다. 이들의 장사 의식은 모두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티베트의 영도자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그리고 몇몇 고승들이다. 특히 티베트를 위한 영원한 헌신을 서원한 제1대 달라이 라마(14세기) 이래로 지금까지 달라이 라마는 제1대가 서원한 대로 계속 환생을 거듭하며 그 대를 이어가는 것으로 티베트 인들은 굳게 믿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인들에게는 살아 있는 부처로 숭앙받는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며 또한 정치적인 최고 결정권을 갖는 국가 통치권자이다. 달라이는 몽골어로 큰 바다라는 뜻이고,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이라는 의미이다. 즉 대해와 같이 넓고 큰 덕의 소유자인 고승이 된다. 1935년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제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Tenzin Gyatso)는 티베트 불교의 전통에 따라 아주 어린 나이에 선대 달라이 라마의 화신으로 인정받았다. 이때부터 그의 특별한 삶의 여정이 시작된다. 티베트 동북지방의 탁처(Taktser)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달라이 라마의 화신으로 인정받고, 네 살 때 티베트의 수도 라사의 포탈라 궁전에 모셔졌다. 매우 넓고 매력적인 그 거대한 궁전에 도착한 어린 달라이 라마는 그때부터 바로 종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대 달라이 라마의 화신인 그라 할지라도, 어린이다운 점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주위의 장난감, 시계, 영사기들을 분해하였다가 조립하는 것을 즐기는 호기심 많은 전형적인 어린 소년이었다. 그러나 꽃과 과수원 사이를 거닐기도 하고, 숲속을 뛰어다니는 전형적인 어린 소년이 달라이 라마임은 그래도 분명했다. 생명에 대한 경외로 사물을 대하고, 장대한 불교의식에서 흔들림없이 영도자의 역할을 하여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티베트가 중국의 침략을 받은 해, 달라이 라마는 열여섯살이었다. 13세기 중엽 몽고군의 침입으로 청나라시대까지 진행된 중국의 티베트 진주는 꽤나 오랜 정복의 역사이다. 근대에 접어들어 러시아, 영국 등의 열강이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면서 달라이 라마 13세의 티베트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함께 티베트의 영유권을 선언한 중국 공산당은, 1951년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달라이 라마 13세의 죽음과 함께 다음 대 달라이 라마로 선출된 14대 달라이 라마는 통치권자로서 전권을 위임받고, 티베트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의 중국 지도자들과 협상을 나누면서 티베트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그의 정치적 역경은, 위대한 자연과 부처의 존재 안에 머물러 있던 어린 소년을 크게 성장시켰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 고립된 왕국으로서 신의 말씀 안에 살았던 평화로운 이 나라가 격동의 현대세계에서 가질 수 있는 발언권은 극히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959년 자신들의 달라이 라마를 지키기 위한 티베트인들의 봉기가 라싸에서 일어났다. 중국의 식민적 수탈과 정치적 탄압에 항거하여 티베트 국민들이 일제히 봉기했을 때 당시 6,000여 불교 사원이 파괴되었으며, 12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학살되었다. 당시 젊은 나이의 달라이 라마로서는 고난 앞에서 국민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의기가 충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살아 남아 티베트의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애정어린 호소에 그는 결국 인도로 망명하였다. 이후 40여 년에 걸친 그의 망명생활은 자유와 평화를 향한 쉬임없는 고행의 길이었다. 이 엄청난 민족적 비극 아래 비폭력을 신봉하는 종교 지도자로서의 고뇌와, 현실적 폭력을 외면할 수 없는 정치 지도자로서 달라이 라마는 어떠한 사상적 편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는 198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억압받은 모든 사람들 그리고 세계평화와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이 상을 받게 된 것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상이 변화를 위한 비폭력주의적 실천이라는 새로운 전통을 세운 마하트마 간디에게 바쳐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분의 비폭력주의적인 삶은 저에게 교훈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욕망을 버리고 영혼의 정화를 갈구하는 티베트인들, 그러나 종교는 아편이라고 믿는 중국정부의 티베트 점령은 한 고립된 국가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중국 당국은 지금도 여전히 티베트의 민족적 문화적 고유성을 파괴하려는 계획적이고도 치밀한 책략을 시행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에게 있어 신앙은 생활이자 정신이다. 수많은 티베트인들을 이끌고 히말라야의 고지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운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고유문화의 보존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비폭력 평화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달라이 라마는 수상을 계기로 티베트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구심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비폭력주의 노선에 입각한 그의 평화사상은 전 세계인의 지지를 받아 티베트와 달라이 라마를 지지하는 우호적인 전 세계 인류를 동지로 확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