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 元 지배 이후의 대표적 민란 가. 使用 · 金成의 난(일설에는 士用·嚴卜의 난)
2. 元 지배 이후의 대표적 민란
가. 使用 · 金成의 난(일설에는 士用·嚴卜의 난)
몽고 지배하에서도 탐관오리의 가혹한 수탈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충숙왕 때에 사용, 김성 등이 난을 일으켜 성주와 왕자를 축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高麗史》 충숙왕 5년(1318) 2월조에는,「제주민 使用·金成 등이 무리를 모아서 난을 일으켜 성주·왕자를 내쫓았다. 성주·왕자가 달아나 이 사실을 알렸다. 戊午에 檢校評理 宋英을 파견하여 안무케 하였는데, 도착하기 전 적들이 스스로 그 괴수 2명을 죽이고 항복하자 宋英으로 목사를 삼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耽羅誌》건치연혁조에는「草賊士用嚴卜等起兵作亂王子文公濟擧兵盡誅之聞于元復置官吏」라 하여 주동자의 이름이 使用, 金成이 아니라 士用, 嚴卜 등으로 다르게 기록되었고, 또 왕자 文公濟 등이 진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계속하여 이 난의 원인을 《高麗史》충숙왕 5년(1318) 4월조에는,「왕은 상왕(충선왕)의 명령으로 대호군 張公允 · 제주부사 張允和를 巡軍獄에 가두었다가, 뒤이어 張公允은 紫燕島로, 張允和는 靈興島로 유배시켰는데, 이는 탐라에서 반란이 일어난 원인이 이 두 사람의 탐학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더욱이 《高麗史》열전 이백겸전에 의하면 당시 난민들이 “만약 李伯謙이나 宋英이 와서 진무한다면 우리가 어찌 반란을 일으키겠는가”라고 한 것을 보면 성주·왕자의 침탈도 이 난의 원인이 되었겠지만 관리와 토호 권세가의 이중적인 가렴주구가 난의 주요 원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건으로 조정에서는 난민의 요구대로 충선왕 2년(1310) 제주목사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푼 바 있는 송영을 제주목사로 다시 부임시켰으며, 난은 그가 도착하기 전(그해 6월)에 자체로 진정되었다. 그리고 난이 진압된 후 元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탐라에서 반란이 일어난 상황에 대한 문책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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