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3. 제주 민란의 역사적 의의
3. 제주 민란의 역사적 의의
거듭된 민란의 발생을 통해 볼 때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란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현실 인식에 대한 주민의 꾸준한 의식 수준의 향상에 따른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민란의 당사자들은 눈앞의 탐관오리의 축출이나 선정관의 파견을 요구하였을 뿐 근본적인 모순의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던 것이 당시 민란의 한계성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민란 발생 이후에도 안무사의 탐학이나 마필의 징발 등 백성들에 대한 침탈은 계속되었다.
수차에 걸친 민란을 통하여 탐라인들의 요구 사항은 중앙 정부에 의해 수용되기도 했으며, 결국 조정에서는 그 회유책으로 탐라 성주를 중앙으로 불러 들여 제주도가 변방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중앙과 연대시키는 내지화(內地化)로의 정책을 강구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가 있다. 내지화(內地化)로의 정책과 관련하여《고려사(高麗史)》우왕 12년(1386) 7월조에 의하면,「전의부정 이행(典醫副正 李行), 대호군 진여의(大護軍 陳汝義)를 탐라로 파견하였는데, 이 때 明나라에서는 탐라말을 취하고자 하고, 또 이 섬이 빈번히 반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아행(李行) 등을 파견하여 그 자제를 불러 회유하였더니, 다음 해 4월에 이르러 이행(李行)은 성주 고신걸(高臣傑)과 아들 봉례(鳳禮)를 데리고 상경했는데 탐라의 귀순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제주도가 고려에 완전한 복종의 태도를 보인 것은 우왕 13년(1387) 4월부터였던 것이다.
● 참고문헌 ① 濟州道, 『濟州道誌』第一卷, 1993. ② 高昌錫, <高麗朝 濟州民亂의 性格>, 『濟州道硏究』제3집, 濟州大學校 人文大學史學科, 1986. ③ 高昌錫, <高麗朝 濟州民亂의 性格(補)>, 『濟州史學』第三號, 1987. ④ 金宗業 , 『耽羅文化史』, 1986. ⑤ 高昌錫, <元·明交替期의 濟州道-牧胡亂을 중심으로->,『耽羅文化』4,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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