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문경공 고조기 묘 Re:書 雲 岩 鎭 : 高 兆 基 운암진에서짓다:평안남도 안주 근방에 있는 절경
문경공 고조기 묘
제주시 아라동 2464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고려시대 제주 유일의 분묘로 지방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조기는 고려의 문신으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공은 고을나의 48세 손이며 고려 선종 5년(1088)에 태어나 의종 11년(1157)에 별세하였다. 초명은 당유, 호는 계림이며, 시호는 문경이다. 성주 고유의 아들로 예종 2년(1107)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남쪽 지방에 나아가 고을을 다스릴 때는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고, 많은 옛 서적을 섭렵하고 역사를 연구하여 깊은 학문을 쌓았다.
한때는 탐라 성주로 있다가 인종 7년(1129) 시어사(侍御使)가 되어 조정의 기강을 세우는데 진력하였다. 인종 8년(1130) 하절사(賀節使)로 금나라에 다녀 왔고, 이자겸이 실각한 후 그의 일파로서 환관과 결탁하여 계속 벼슬자리를 누리고 있던관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가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으로 좌천되었으나, 그 후 다시 대간이 되어 이자겸의 난 때 동조한 조정 신하들의 파직을 상소하다가 예부낭중으로 전직되기도 하였다.
의종 1년(1147)에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 이듬해에 정당문학 판호부사(政堂文學 判戶部事)를 거쳐 1149년에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고, 1151년에는 중군병마판사 겸 서북면병마판사를 역임하였다. 뒤에 탄핵을 받아 상서 좌복야로 전직되었다가 수개월 후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다. 공은 고려 조정에 출사한 이래 칠순의 고령으로 퇴임할 때까지 오직 충절과 청렴으로 일관하였다. 의종 11년(1157) 사망하자 왕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해당 관리에게 명하여 호상케 하였으며,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그의 열전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는 제주시 아라동경 남문 밖 제궁(濟宮)동산에 안장하였는데 제주도내의 분묘 가운데 양식과 형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매년 삼성 춘계 대제 전날인 4월 9일에 묘제를 지내고 있다. 묘는 남향을 하고 있으며 ‘고려중서시랑평장사고조기묘(高麗中書侍郞平章事高兆基墓)’라 음각된 묘비와 상석, 장군석, 동자석, 석등 등을 갖추고 주위에는 담장으로 축조되어 있다. 내부에는 정면 4.34m, 측면 5.13m의 장방형 봉분을 쓰고 있다. 묘의 특징은 봉분 네 귀퉁이에 현무암제 할석으로 2단을 올려서 봉토 자체의 유실을 방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묘 자체의 안정감을 더해주고 있다.
● 참고문헌
① 高昌錫, <歷史時代의 文化遺蹟>,『제주의 문화유산』, 한국이동통신 제주지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