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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수(金須) 장군 碑

제주큰동산 2013. 9. 20.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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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4일 14:18  제주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산세미오름 기슭의 김수(金須) 장군 碑

 

   증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첨지정사 집현전태학사 판예부사 감찰어사 영광부사 광산김공 휘 수 장군 유적비문(贈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參知政事集賢殿太學士判禮部事監察御史靈光副使光山金公諱須將軍遺蹟碑文)

 

 

 

 

  오호라!  이곳 제주의 삼심악(三心岳)은 고려의 충신 김수(金須)장군 유적지(遺跡地)이다.  이 비의 서남쪽 수십보 거리에 있는 장방형의 거분(巨墳)이 바로 이 지방에서 구전(口傳)해오는 김수 장군 묘이고, 동북쪽에 있는 못이 구전(口傳)해오는 김수 장군지(金須將軍池)이다. 묘의 규모로 보아 당시 조정에서 얼마나 장군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예장(禮葬)을 명했는지 짐작할 수 있으며 지명(池名)이 지금껏 토민(土民)들의 입에 전래(傳來)하는 것으로 보아 공의 의열(義烈)이 얼마나 당시의 인사(人士)들을 감복시켰는지 알 수 있다.

  

          

 

 

  장군은 고려의 원종시인(元宗時人)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군은 신라 왕자 흥광의 후예(後裔)로 관향(貫鄕)이 광산이요, 대장군 김경량(金鏡亮)의 자(子)다. 어려서부터 담략(膽略)이 과인(過人)하고 청고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고종(高宗) 4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어사에 이르고 다시 영광부사로 나갔다가 때마침 삼별초의 난이 터져 왕명을 받들어 군(軍) 200을 영솔하고 고여림 장군과 함께 이곳 제주로 건너와 도민들과 더불어 환해장성(環海長城)을 구축하고 삼별초군의 상륙을 저지(沮止)했다.

 

 

     

 

 

 

  그런데 위장(僞將) 이문경이 군중에 잠입하여 적과 암암리에 내통을 하고 군심을 교란시킴으로 전(戰)을 하다가 사태가 불리하자 장군은 적진 중으로 돌입(突入)하여 좌충우돌 무수한 적을 무찌르다. 기력(氣力)이 진(盡) 시석(矢石)아래 절사(節死)을 한 것이다.

  나라에서는 공의 충절을 포상하여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첨지정사 집현전태학사 판예부사를 추증하였고 유족에게도 후한 미곡(米穀)이 하사되었다. 그런데 풍상세월(風霜歲月) 속에 자손들은 이 장군의 유적지를

망각(忘却)의 성(城)에 두고 있다가 금년 봄에야 비로소 발론(發論)되어 이 지역을 답사 확인을 하고 사단(祀壇)과 신도비(神道碑) 그리고 사적비(事蹟碑)를 마련하고 이 유적지(遺蹟地)에도 표석(表石)을 봉수(奉竪)하게 된 것이다. 

 

  오호라! 현회(顯晦)가 유수한 것인지 감춰졌던 장군의 충절이 다시금 빛을 보게 되었도다. 이 비(碑)는 후손 종중(宗中)이 전담(專擔)으로 세우는바 그 효사(孝思) 또한 가상타 하겠다. 명(銘)하노니,

 

 

 

  한라산 하늘에 솟고 남해 창파 땅을 덮었다. 아득한 천년사(千年史)를 어느 곳에 물을거나. 장군묘(將軍墓) 장군지(將軍池)가 구전으로 전해온다. 지금도 파도(波濤)소리 삼별초의 함성(喊聲)인 듯 푸른 나무에 스치는 바람 장군의 호령인 듯 산해는 예 같은데 인걸은 어디갔나. 왕명을 거역(拒逆)했기에 별초(別抄)는 역(逆)이 되고 왕명을 받들었기에 장군은 충(忠)이 됐으며 백성을 침해(侵害)했기에 별초(別抄)는 적(賊)이 되고 백성을 지켰기에 장군은 성인(成仁)을 했다. 백세(百世)의 공론(公論)이 있어 청사(靑史)가 증명을 한다. 창상(滄桑)이 수없이 바뀌어도 이 글은 닳지 않아 장군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을 무궁토록 전하리라.

 

  한라산 하늘에 솟고 남해 창파 땅을 덮었다. 아득한 천년사(千年史)를 어느 곳에 물을거나. 장군묘(將軍墓) 장군지(將軍池)가 구전으로 전해온다. 지금도 파도(波濤)소리 삼별초의 함성(喊聲)인 듯 푸른 나무에 스치는 바람 장군의 호령인 듯 산해는 예 같은데 인걸은 어디갔나. 왕명을 거역(拒逆)했기에 별초(別抄)는 역(逆)이 되고  왕명을 받들었기에 장군은 충(忠)이 됐으며 백성을 침해(侵害)했기에 별초(別抄)는 적(賊)이 되고 백성을 지켰기에 장군은 성인(成仁)을 했다. 백세(百世)의 공론(公論)이 있어 청사(靑史)가 증명을 한다. 창상(滄桑)이 수없이 바뀌어도 이 글은 닳지 않아 장군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을 무궁토록 전하리라.

 

        檀紀四千三百二十年(西紀一九八七) 丁卯十月 日

      星州 李 栢 淳 謹撰

      礪山 宋 泰 炅 謹書

 

 

         참고자료 : 광산김씨 홈페이지

 

 

 

사진 : 김수(金須) 장군 碑, 제주큰동산, 2010.11.14.14:18, 제주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산세미오름 기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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