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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별방조점(別防操點)

제주큰동산 2013. 9. 20. 20:47

별방조점(別防操點)

 

 

1702년 10월 30일 순력(巡歷). 별방성에서의 군사훈련과 성정군·군기·우마를 점검하는 그림

 

  별방진(別防鎭), 황자장(黃字場), 지미봉수(指尾烽燧), 하도의리리(下道衣離里)의 민가, 연대의 위치가 상세하다. 바닷가를 제외하고는 곳곳에 민가가 있어 마치 민가들이 성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지금의 창흥동 철새도래지보다 훨씬 더 깊이 종달리 쪽으로 만(灣=龍項浦)이 들어가 있어 300년 사이에 지형이 변했음을 볼 수 있다.

  

  

  별방진은 만조시(滿潮時)에 바닷물이 성 안으로 흘러들어 오도록 되어 있으며 이곳을 ‘湖水’라고 표시했다. 지금도 호수 자리에는 연못처럼 물이 고일 수 있도록 남겨져 있다.

 

 

  그림을 살피면 동창(東倉)과 객사 건물의 위치를 볼 수 있다. 그림에서 큰 건물(客舍, 東倉, 軍器)은 팔작지붕이며 짙은 회색으로 되어 있어 기와집이 확실하나 동·남·서문과 주변 건물은 노란 색으로 되어 있어 초가였던 것 같다.

 

  순력 중에 10월 30일은 이곳에서 머물렀다. 별방진의 조방장(助防將)은 김여강(金汝江)이고, 성정군의 규모는 423명으로 화북성의 성정군 수효와 일치를 보인다. 황자장의 우마수는 흑우 247수, 말 946필이며, 목자와 보인은 모두 187명이다. 별방진 내에 위치해 있던 동창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은 2,860여석으로 부기되어 있다. 한편, 별방진 관할의 봉수와 연대는 김녕리 입산(笠山)봉수, 한동리 왕가봉수(往可烽燧), 평대리 입두(笠頭)연대, 한동리 좌가(佐可)연대, 월정리 무주연대(無住烟臺) 등이다.

 

 

 

  성의 보존 상태를 보면 서문과 남문 사이에 남아 있는 부분이 있고, 성의 위는 대부분 원형을 잃어 버렸다. 동문지는 흔적이 없으나 옹성터로 추정되는 밭이 남아 있고, 서문 터는 길이 되었고 서문 옹성 터는 마을 스피커와 공덕비 등이 세워진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문 옹성 터

 

마을 스피커와 공덕비

 

  남문지에는 옹성이 훼손이 심한 상태로 남아 있고 문루는 남아 있지 않다. 남문지의 동쪽은 1995년, 2007년 2차례에 걸쳐 일부의 성벽과 회곽도, 치성을 복원하였다. 남문 서쪽에서 서문까지는 복원하지 않은 성벽이 무너져가는 채로 남아 있으나 그 중간에 있는 치성의 일부분은 대단히 치밀하게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치성 안쪽에 경사면을 설치한 모습 

 

  성벽 상부는 완벽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없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미석(眉石)과 여장(女墻)이 있었다고 주민들은 증언한다.

 

 

 옹성은 성벽과 일체식으로 하였으나, 치성(雉城)은 성벽을 먼저 축성한 후 덧쌓는 방법으로 하였다. 옹성(瓮城) 3개소, 치성(雉城) 7개소가 있었다. 복원 과정에서 남문과 동문 사이 치성 안쪽에 경사면을 설치했는데 혹 후대에 대포를 성벽 위에 올려 놓으려고 만든 경사면은 아닐까 하는 추정은 해 보지만 고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

 

 

  성벽의 남쪽 바깥 밭으로 사용되고 있는 땅은 그 모양이 성벽을 따라 동서로 길게 이어진 것으로 보아 해자(垓字)를 설치했던 자리임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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