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감귤봉진(柑橘封進)
각 종류의 감귤과 한약제로 사용되는 귤껍질을 봉진하는 그림. 망경루 앞뜰에서 각 종류의 감귤과 한약재로 사용되는 귤껍질을 봉진하는 그림이다. 감귤의 포장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망경루 앞뜰에서 여인들이 귤을 종류별로 나누고 있고, 이형상 목사는 연회각에 앉아 이를 일일이 점검하고 있다. 여인들 옆에는 남정들이 나무통과 짚단을 만들고 있다. 감귤을 봉진하는 과정에서 짓눌려서 훼손되거나 썩어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짚단을 이용해 싸고 나무통에 다른 물건과 함께 넣도록 했다.
그림 아래 적힌 내용을 보면 봉진한 수량은 다음과 같다. 당금귤(唐金橘) 678개, 감자(柑子) 25,842개, 금귤(金橘) 900개, 유감(乳柑) 2,644개, 동정귤(洞庭橘) 2,804개, 산귤(山橘) 828개, 청귤(靑橘) 876개, 유자(柚子) 1,460개, 당유자(唐柚子) 4,010개, 치자(梔子) 112근, 진피(陳皮) 48근, 청피(靑皮) 30근 등이다.
귤의 진상을 마련하기 위해 중종 21년(1526)에 이수동(李壽童) 목사는 별방, 수산, 서귀, 동해, 명월방호소에 과원(果園)을 설치하고, 그 곳을 수비하는 군인으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 후 과원은 제주목에 22개, 정의현에 7개, 대정현에 6개로 증설되었으며, 숙종 때에는 모두 42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과원에서 생산되는 양으로써 봉진의 수량을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관(官)에서는 일반 민가(民家)에 있는 귤나무를 일일이 조사하여 관리하였다.
이렇게 봉진된 감귤은 천신용(薦新用=제사에 쓰이는 햇과일)과 물선진상용으로 활용되었다. 천신용은 예조에 보내어 조경묘(肇慶廟), 종묘(宗廟), 경모궁(景慕宮), 효정전(孝定殿), 산릉(山陵), 휘정전(徽定殿)의 순서에 따라 제사용 천신과일로 나누어졌다. 물선진상용 귤은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대비전 순서로 나누어졌다.
한편, 제주의 귤이 조정에 도착하면 임금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그 일부를 나누어주면서 과거가 시행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황감제(黃柑製)라는 과거시험이다. 영조 이후로 임금의 특명으로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에게 제주 귤을 하사하면서 제술(製述)을 시험하던 제도이다. 이에 수석으로 합격하면 문과의 전시에 곧바로 나아가는 특전을 베풀기도 했다.
귤의 진상은 9월부터 시작하여 매 10일 간격으로 1운(運)에서 20운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그림이 천신용 2차 진상 21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위 원칙이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제주목사였던 박장복은 헌종1년(1835) 효화전(孝和殿) 천신용(薦新用) 감귤을 궐봉한 일로 파직되기도 했다.
승정원일기 고종 24년(1887) 11월 21일에 보면 “방금 제주 목사 심원택이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지난 10월에 바치게 되어 있는 천신에 쓰일 당금귤(唐金橘)과 감자(柑子)를 낱낱이 땄더니 당금귤이 152개, 감자가 112개였습니다. 그런데 조경묘(肇慶廟)의 천신에 쓰일 당금귤 16개와 감자 14개를 봉진하고 나니 남은 당금귤 136개와 감자 98개로는 종묘와 경모궁에 분배하여 천신할 길이 없기에 삼가 전례를 원용하여 모두 봉해서 예조로 올려 보내겠으니, 품지하여 천신하도록 하소서.’하였습니다. 이전에 귤이 드물게 열렸을 때 이미 수를 줄여서 천신한 예가 있으니, 이번에도 전례에 따라 분배하여 당일에 천진(薦進)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또 승정원일기 고종 28년(1891) 12월 28일에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제주 목사 이규원(李奎遠)이 올린 장계의 등보(謄報)를 보니, ‘지난 10월에 바치게 되어 있는 천신(薦新)에 쓰일 당금귤(唐金橘)과 감자(柑子)를 하나하나 따 보았더니 당금귤이 76개, 감자가 78개였습니다. 그런데 조경묘(肇慶廟)의 천신에 쓰일 당금귤 16개와 감자 14개를 봉하여 올리고 나니, 남은 당금귤 60개와 감자 64개로는 종묘, 효모전, 산릉, 경모궁에 분배하여 천신할 길이 없기에 삼가 전례(前例)를 원용하여 모두 봉해서 예조로 올려 보내겠으니, 품지하여 천헌(薦獻)하도록 하소서.’하였습니다. 이전에 귤이 드물게 열렸을 때 이미 수를 줄여서 천헌한 예가 있으니, 이번에도 전례대로 분배하여 당일에 천진(薦進)하게 하되, 산릉의 천신은 혼전 내관(魂殿內官)이 규례대로 받들고 능소(陵所)에 나아가 천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면 제주의 감귤은 해마다 그 수량을 꼭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탐라순력도 시기와 1891년을 비교해 보면 당금귤 678개⇒76개, 감자 25,842개⇒78개로 줄어들었다. 고의로 귤나무를 고사케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탐라순력도 중에는 감귤을 주제로 한 감귤봉진(柑橘封進), 귤림풍악(橘林風樂), 고원방고(羔園訪古)등 3면의 그림과 과원의 위치를 표시한 제주조점(濟州操點) 등 3면의 그림이 있다. 총 41면의 그림 중 감귤을 주제로 한 그림 3면이 있다는 것은 당시 시대상황으로 봤을 때 그 당시에도 감귤을 중요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주큰동산 역사뜨락 > 제주도 향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용천동굴은 용암이 뚫은 3km 터널, 통일신라 유물이 가득 (0) | 2013.09.20 |
---|---|
[스크랩] 귤림풍악(橘林風樂) (0) | 2013.09.20 |
[스크랩] 제주양노(濟州養老) (0) | 2013.09.20 |
[스크랩] 제주전최(濟州殿最)와 제주사회(濟州射會) (0) | 2013.09.20 |
[스크랩] 제주조점(濟州操點) (0) | 2013.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