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길을 지나며 당신을 추억합니다/ 언제나 그리움은 가슴에 묻고…/ 편히 잠드소서/ 2005. 5. 19 ○○’.
먼저 간 그녀를 그리는 한 남자의 축원이다. 북한산(北漢山·836m)의 옛 절터 아래 개울가 작은 돌에 적혀 있다. 근처에서 서늘하면서도 훈훈한 기운이 전신을 감싸는 이유다. 경기도 고양시 북한동 중흥사지를 지날 때 유심히 살펴봄 직하다.
그는 북한산 산신이 그녀의 영혼을 보살피리라 믿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북한산 신령은 경황이 없다. 대신 중흥사(重興寺)의 호국승 혼령들이 그녀의 영가를 위무하고 있다. 조선 숙종(肅宗) 때의 중흥사 부설 북한산성 총섭(摠攝) 소속 스님들이다. 군복무하듯 중흥사를 본부 삼아 북한산성을 지키던 승려 겸 병사였다.
당시 승병 한 분이 “우리는 이런 일에 워낙 이골이 난 중들이라…”면서 중흥사의 비밀을 귀띔했다. ‘(북한)산성을 지키는 것은 대외적 명분이었을 뿐 북한산을 차지하려고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 희생당한 삼국시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는 것이 진짜 임무였다’는 요지다.
국가에 위난이 닥치면 불경을 접고 창을 드는 무술승, 소림사 권법승쯤으로 속단하고 대했던 터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신의 품으로 깃든 영가를 스님들에게 맡길 만큼 북한산신은 지쳐 있다.
서울 외곽순환도로 공사가 신의 심기를 건드렸다. 사람에게는 개발이지만,
산신 처지에서는 봉변이다. 깊은 산중을 포기한 채 산신이 산 아래로 내려와
여염집에 주저앉는 기현상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산의 모습은 해당 산신의 외모를 빼닮는다. 화강암 준령과 깊고 수려한 계곡이 어우러진 북한산의 신은 사람으로 치면 얼짱, 몸짱이다.
머리와 수염은 새하얀데 핑크빛 얼굴은 주름 한 줄 없이 팽팽하기만 하다.
북한산은 큰 산이다.
서울 도봉구, 성북구, 종로구, 은평구와 경기 고양시까지 안고 있다.
나이는 1억5000만살이나 된다.
백운대 병풍암, 동장대, 대동문, 보현봉, 형제봉, 구준봉, 북악산,
인왕산, 무악재, 안산(연세대 뒷산)까지가 북한산신의 관할구역이다.
바위 봉우리 사이의 효자리, 북한산성, 구천, 우이동, 정릉, 구기, 평창 계곡 역시
북한산의 이름 아래 청량함을 더 하고 있다.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 꼭대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누구나
‘좌경천리 입경만리(坐景千里 立景萬里)’라는 말을 떠올린다.
앉아서 1000리, 서면 1만리를 보는 도인의 경지에 들었다고 착각할 법도 하다.
도봉산, 수락산, 북악산, 불암산, 아차산, 청계산, 남산, 남한산, 관악산,
소요산, 운악산, 명지산, 화악산, 축령산, 화야산, 용문산, 감악산,
그리고 한강과 강화도, 영종도가 눈을 시원하게 만든다.
탄성이 절로 난다.
북한산은 서울을 수호하는 산이다.
산신도 이 점을 아주 자랑스러워 한다.
“삼국시대부터 서울을 차지하려고 그토록 쌈박질을 해대더니,
이제는 서울을 떠나지 못해 안달이냐”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직은 수도를 옮길 때가 아니다”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북한산, 즉 서울을 얻으려고 피를 흘려가며 일진일퇴했다.
힘을 키워 북진하던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서기 137년 북한산에 성을 구축했다.
만주대륙으로 뻗어가던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장수왕(長壽王)도
북한산만큼은 놓치기 싫었다. 북진과는 별개로 남진해 백제의 북한산성을
함락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할 정도로 애착이 컸다.
삼국시대의 마지막 북한산 주인은 신라다.
24대 진흥왕(眞興王)은 몸소 북한산을 찾았고, 이를 대내외적으로 도장 찍듯
기념한 것이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다.
즉위 16년째인 서기 555년 북한산 순행 직후 세운 비석이다.
국보 3호라 오리지널은 중앙박물관에 모셔뒀다.
북한산에 있는 비는 모조품이다.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말고도 경남 창녕과 함경남도 황초령,
마운령 등 4군데서 발견됐다.
창녕은 신라의 마당이나 다름없고, 함남은 대륙을 겨냥한
신라의 웅비욕을 상징하는 지역이다. 중
간지점의 북한산 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
서울을 중심으로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뜻이다.
1500년 전 신라는 벌써 북한산의 영기(靈氣)를 간파하고 있었다.
고려 시절 북한산은 잠시 인간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고려가 개성에 도읍을 정한 덕이다. 물론 안식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조선의 선조(宣祖)와 인조(仁祖)가 북한산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부터다.
각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두 왕은
북한산으로 피신했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전투에서 인조의 군대는
청나라 침략군에 무릎을 꿇었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둘째 봉림대군(鳳林大君),
3남 인평대군(麟平大君),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이조판서 이명한(李明漢),
그리고 ‘삼학사(三學士)’로 유명한 홍익한(洪翼漢·사헌부 장령), 윤집(尹集·홍문관 교리),
오달제(吳達濟·홍문관 부교리)가 청나라의 볼모 신세가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청으로 끌려가던 김상헌은 벽제에서 북한산을 향해 이렇게 읊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북한산이 삼각산(三角山)과 동의어임을 입증하는 시조다.
백운대(836.5m), 인수봉(810.5m), 만경대(옛 국망봉, 799.5m) 등
북한산의 암봉 셋은 안정적으로 정립(鼎立)해 있다.
통일로를 따라 구파발로 진입할 때 눈앞에 펼쳐지는 북한산, 동부간선도로에서
의정부 쪽으로 가면서 보는 북한산은 삼각산이라는 이름 그대로다.
나무의 기세가 충만해 번영과 희망을 낳아
병자호란 중 남한산성의 치욕을 잊을 수 없는 효종은 북한산으로 눈길을 돌렸다.
청으로 잡혀갔던 봉림대군이 바로 효종이다.
절치부심 끝에 유비무환의 적격지로 북한산을 지목했다.
1659년 북한산에 안가(安家)를 차렸다.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영화
‘패닉 룸’의 철옹성을 북한산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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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 사모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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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효종의 지시로 북한산성 요새를 처음 기획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혼백은
요즘도 날이 좋으면 북한산에 들른다.
“임란이어처(臨亂移御處·전쟁발발시 왕의 피란처)로 북한산을 택했는데,
효종대왕 당대에는 계획만 하다 말았고 숙종 임금으로 내려가서야 비로소 성을 쌓았다”고
회고한다. 바로 북한산성이다.
숙종 때 귀양살이를 한 한이 풀리지 않은 듯 우암은 효종을 ‘대왕’,
숙종을 ‘임금’으로 칭하고 있다.
북한산성은 ‘산 속으로 옮긴 한양’이었다.
문 14개, 연못 26개, 우물이 99개나 됐다.
문수봉 남장대, 노적봉 북장대, 대동문 동장대 등 전투 지휘본부격인 장대(將臺)도
3곳을 가동했다. 대동문, 대남문, 대서문 등 산성의 대문 명칭은 유사시 임시수도가
북한산이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한양의 동대문, 남대문, 서대문의 앞뒤 글자만 바꿨을 따름이다. ‘
하늘이 내린 안전한 산’이라는 믿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북한산은 이토록 의미심장한 산이다.
돌산이지만 나무(木)의 기세가 충만한 북한산의 땅기운은 번영과 희망을 낳는다.
그렇다고 북한산 자락에 거주하면 누구나 발복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에게는 도리어 해를 입힌다. 특히 평창동이 정치와 상극(相剋)이다.
북한산에서 뻗은 암반을 깎아낸 터에 지은 집에 사는 정치인은 엄청난
수맥의 파괴력과 바위의 살기 탓에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산의 돌들이 날아가 꽂히는 형세가 적용되는 곳이 평창동이다.
그곳에 거주하는 정치인에게서 온화한 마음이 나올 수 없다.
정계에서 대성코자 한다면 한남동이 바람직하다.
한강이 팽이처럼 돌면서 순행, 기가 운집되는 동네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지키는 최적의 산이 북한산이다.
북한산이 버티고 있기에 서울은 천혜의 요충지가 됐다.
고구려·백제·신라-고려-조선이 일찌감치 역사로 기록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