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님이 작고했다.
그토록 많은 칼럼을 남기고
그토록 많은 생각거리를 국민들에게 제공한 임은 떠났다.
1996년 12월 임은 왜 이 칼럼을 썼는지 왜 따라지 칼럼을 반박하는 듯한 칼럼을
썼는지...아기장수는 반박할 가치도 없는 따라지인데...우연인가요?
임의 펜은 아기장수의 칼보다 강합니다.
임의 명복을 위해 고개 숙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임 유(類)의 역사관을 가진 자의 명복도 빕니다.
4339.
2. 26. 아기장수
琉球(유구)국 수도이던 오키나와를 首里(수리)라 하고 그 왕성을 지금도 수리성이라 한다. 그 왕성의 정문이 守禮門(수례문)이다. 바로 유구왕이
중국 사신에게 사대 의례를 지킨 현장이라는 뜻이다. 수리라는 지명이 바로 이 수례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유구국의 事大門(사대문)이
수례문이듯이 조선의 사대문은 迎恩門(영은문)이다.
천자의 은혜를 맞아들이는 문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천자의 명령인 詔文(조문)을 맞아들이는 문이라서 迎詔門(영조문)이라 했던 것을 그 후 명나라
사신인 薛廷寵(설정총)이 와서 보고 어찌 맞아들이는 것이 조문 뿐이랴. 勅文(칙문)도 있고 賞賜(상사)도 있으니 영은문으로 개명하는 것이 좋다
하여 영은문이 된 것이다.
이 영은문을 거치면 서편의 언덕배기에는 우람한 기와집이 있었는데 그곳이 慕華館(모화관)이다. 중국을 흠모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春官志(춘관지)」에 그 모화관 의례 궤범이 적혀 있는데 중국 사신이 오면 임금이 이곳까지 마중나와 맞이했는데 사신과 임금이 맞서는 향이며
절하는 빈도며 허리 굽히는 굴곡도며 울화가 치밀 정도로 굴욕적인 예를 치러야 했다. 칙서라는 종이 쪽지를 앞에 놓고 임금으로 하여금 천자에 하듯
한 예를 강요하는 대목은 가소롭기까지 하다. 약소국의 비애와 중국의 존대함에 분통을 촉발시키는 모화관이 아닐 수 없다.
한말 사대 중국으로부터 독립의 기운이 감돌았을 때 가장 눈에 거슬리는 것이 사대의 상징물인 이 영은문과 모화관이었다. 그래서 서재필 등 독립
지사들이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 간판을 떼어 내고 독립관이라는 새 현판을 달았다. 그리고 독립-개화 운동의 모든 행사는
바로 이 독립관에서 거행했다. 「어깨는 독립문과 그 높이를 견주고 / 흉금은 독립관과 그 넓이를 견주도다.」 그 무렵 학생들이 즐겨 불렀던
독립가의 한 대목인 것이다.
徐載弼(서재필) 李承晩(이승만) 尹致昊(윤치호) 안경수 南宮檍(남궁억) 尹孝定(윤효정) 등 개화 독립파 인사들이 「거리에 가로등을 다는
문제」「조정에 낮도둑을 잡는 문제」「아문에 퇴침을 들고 출사하는 문제」 등 정부의 보수파에게 가시가 되는 문제들을 이 독립관에서 토론, 독립
개화의 기운에 불을 지른 성지다.
사라졌던 그 독립관이 그 현장에 복원돼 모습을 드러냈다. 유사와 더불어 시작된 2천년의 사대 역사에 찍힌 종지부가 바로 이 독립관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가 이곳에서 시작되는 시발점이어야 할 것이다.
- 조선일보 96. 12. 26. 이규태<독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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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 개혁을 주창한 무리 중에 개화당이 있었다. 그들 중 대표는 김옥균이다. 그는 일본의 자금과 군대를 등에 업고, 서재필 등의 일본
사관학교 출신들과 정변(政變)을 일으켰지만 3일만에 끝나고 말았다. 이후 일본에 도피했다가 다시 청일 전쟁 이후 일본군의 위세를 몰아
갑오경장으로 재집권했다. 이때 개화당의 중심 인물로 유길준과 이완용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들 급진 개혁주의자들은 조선의 현실을 무조건 폄시하고, 외래문화 외래사상에 맹종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우리다운 모습으로 사는 것을
철저히 배격했다. 그들의 막강한 개혁으로 ‘양복 입은 신사'가 되고‘핫바지는 촌놈'이 되었다. 그들의 개화 목표는 서구화 내지는 일본화였다.
그래서 그들은 종국에는 나라까지 남의 나라가 좋았던 것이다. 개화의
반대말은 미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의 과거는 미개한 것이고,
미개족의 왕은 추장이라 하니까 세종대왕도 세종대추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을 송두리째 부정했다.
개화당 이후 백년이 지난 지금, 세계화의 시점에서도 우리가 우리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전통적 윤리가 바탕인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로 시작하던 초등학교 첫 배움을 ‘나, 너, 우리'로 바꿔놓고 서구식 시민상을 조장한 것이 그러하고, 학생에게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개혁을 주창하는 교육개혁 위원회의 시안도 그러하다. 체벌을 폭력과 동일시하는 것은 서구식 사고이다. 우리의 교육 현장에는 체벌인 편달(鞭撻)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교사(敎師)가 지도 편달하면서 교편 생활하는 것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살아온 방식이다. ‘교편(敎鞭)'의
‘敎(교)'자에도 채찍(乂)은 있고 ‘鞭(편)'자는 아예 채찍질이라는 뜻이다. 교편 없이 우리다운 교육은 있을 수 없다. 우리답지 않은 교육은
국적 없는 교육이다.
비단 교육 현장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우리의 전통 문화나 사상이 가치를 인정받을 때,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답게 살 수 있고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개화와 세계화의 가치 기준은 정반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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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1996. 12. 7. 정재원 <개화와 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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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왜곡되어도 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