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
A Criminal History of Mankind
잔혹 : 피와 광기의 세계사
저자 : 콜린 윌슨
1931년 6월 26일 영국 레스터(Leicester) 지방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스스로 벗어나고 싶은 의지 외에는 아무것도 준 것이 없다는 그의 가족사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8살까지 글자를 모르던 그는 어느 날 독학으로 글자를 익힌 후부터는 뭐든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만화책, 로맨스, 탐정잡지, P. G. 우드하우스(Wodehouse)의 코미디 책들, 괴상한 이야기 등에 매료된 그에게 또래들이 관심 가지는 동화란 지겨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었다. 특히 과학잡지 등을 탐독하면서 독자적인 지식세계를 쌓아나갔다. 13살 때 첫사랑에 실패한 후, 괴로움을 이기기 위해 그는 노트를 하나 사서 이제까지 읽은 과학 지식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막히는 부분이 나오면 그에 필요한 책을 읽었다. 책이 포괄하는 분야는 점점 넓어져 심리학과 철학에까지 이르렀고 원고는 노트 6권 분량이 되었다. 윌슨은 이 경험이 '집필의 즐거움'을 깨달은 첫경험이었고 '생각의 뿌리를 찾아가는 법'을 익힌 순간이었다고 기억한다.
16살 때 본격적인 과학자로서의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 그는 아버지의 종용으로 모직공장에서 돈벌이를 시작하지만 곧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다. 그 후로 그는 세무서 직원, 공군 조종사, 카펫 세일즈, 접시닦이 등을 전전하면서 꾸준히 집필을 계속한다. 그는 24살 때 역사속의 이단아들과 그들의 철학을 평가한 [아웃사이더]를 발표, 토인비 등 당대 석학들의 서평으로 극찬을 받으면서 「타임」「라이프」등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젊은 작가가 되었다. 당시 그의 책에 대한 서평 헤드라인은 '천재적인 작가, 겨우 24살!'이었다. 윌슨 자신 역시 그의 책 '아웃사이더'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일종의 현실부적응자다. 그가 전전한 직업은 모두 껍데기였을 뿐이며 가정이나 명예, 행복한 미래는 그의 안중에 없었다. 오로지 도서관에서 편집증 환자처럼 책에 몰두하고 튀어나오는 대로 미친 듯이 글을 써내려가는 것이 그의 일상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그에게는 여러 수식어가 붙는다. 잔혹사가, 행형학자, 오컬티즘 신비주의자, 평론가 등. 그에게 붙은 수식어 만큼이나 다작을 내놓고 있는 그는 지금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분주히 활동하고 있다.
1. 해적과 모험자
●해적 오딧세우스:무법의 고대인
범죄율의 상승을 우려하고 소리가 요즘 높아가고 있다. 다만 그 소리에는, 일반 시민은 법률로 보호받고 있다는 자명한 전제가 있다. 경찰관은 도시의 거리나 시골길을 순찰하지만 절도와 몸으로 덮치는 강도는 확실히 증가추세에 있다. 어쨌든 적어도 이러한 종류의 모법자는 법죄를 저지를 때마다 자기 힘으로 도망쳐야만 한다.
한편 과거 3,000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상상력을 작동시킬 필요가 있다. 우선 '법률에 의한 보호'라는 사고방식은 옆으로 제쳐놓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거리에 출몰하는 도적이나 바다를 휩쓸고 다니는 해적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시민이라도 그럴 생각만 있으면 아주 쉽게 도적이나 해적으로 변신하였다. 아무도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호메로스(Homeros)의 작품이라고 하는 <오딧세이아>에서 주인공 오딧세우스는 자랑스럽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트로이에서 돌아오는 도중, 배가 트라키아 해안 근처에 다다랐다. 거기서 방비가 없는 마을 가까이에 상륙하여, 남자는 모조리 죽이고 여자와 재물을 약탈하였다." 이때 그리스와 트라키아는 전쟁상태가 아니었다. 방비가 없는 마을은 누구에게나 안성맞춤의 먹이일 따름이다. 전쟁에 익숙해져 있던 그리스인은 소규모의 폭행과 약탈이 또 일어났구나 하는 정도로밖에 느끼지 않는다. 이 상황은 그후 약 3,000년의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 면면히 계속된다. 지중해의 도시나 촌락들이 거의 대부분 내륙 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적떼에게 점령된 도시
이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은, 영국과 같은 '법률을 지키는' 나라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사실이다. <영국 범죄사>(1873)에서 저자 루크 오웬 파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대는 흑사병이 퍼지기 직전의 14세기. "방화는 일상 다반사였다. 납치도 자주 일어났다. 살인협박으로 몸값을 요구한다‥‥ 몸값을 지불한 경우에도 인질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가해를 모면하고 돌아오면 다행으로 여겼다."
이것은 특별히 전쟁이나 사회적 소란이 있었던 시대의 일이 아니다. J. E. 니콜스와 존 테일러의 공저 <브리스톨의 과거와 현재> (1881)에 의하면, "(잉글랜드는) 그때까지 최고로 번영하였고, 인구는 증가했으며, 사람들은 유복하고 사치를 구가했다.‥‥"는 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도적떼는 소규모 군대처럼 으스대며 거리를 활보하였다. 마을에서 축제가 있을 때면 누구나 방심을 한다. 그들은 곧잘 그것을 노려 습격하였다. 마을 전체를 제압하고 약탈하며 불을 지르고(불을 지르면 세간을 구하느라고 추격이 늦어진다), 그리고 나서 도주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1347년과 그 이듬해에 브리스톨은 도적때에게 점령되었다. 그들은 항구의 선박(일부는 왕의 소유)을 약탈하고 정복자인 양 포고문까지 냈다. 의기양양하게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물건을 강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왕은 버클리경 토머스를 파견하여 질서회복을 도모했을 정도였다. 어느 상인이 필리파 여왕 소유의 보석류를 자택에 숨기고 있음이 드러났다. 애덤 더 레퍼라는 두목이 이끄는 강도 일당이 침입해서 보석을 빼았고 집에 불을 질렀다. 재판은 거의 무력하였다. 이 두목은 윈체스터 부근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부하들이 재판소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모조리 덮쳤다. 재판은 중지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4세기 후 문학가 닥터 존슨(Dr. Johnson, 1709-1984) 시대가 되어서도 상황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도적떼는 밤이 되면 시골집으로 밀고 들어와 때로는 방화도 하였다. 칼로 무장한 노상강도떼가 런던의 코벤트 가든 근방에서 상류계급의 파티장을 덮쳤다. 작가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 1717-1797)은 하이드파크에서 노상강도에게 총상을 입었다.
<경찰과 범죄의 미스테리>에서 저자 아서 그리피스(Arthur Griffith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곡물류는 항상 약탈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과실이나 야채도 마찬가지였다. 한낮에 밀이삭이 줄기째 잘려 나갔다. 강도떼는 그것을 대담하게도 제분소로 가지고 가 가루를 만들도록 강요하였다. 제분소는 전답이나 곳간에서 최근에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하였다. 제분소가 소각되는 것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다."
메이휴의 <런던의 노동계급과 빈민계급>, 또는 켈로 체스니의 <빅토리아조의 암흑가> 등에 의하면,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런던에서도 백주에 노상강도가 출몰하였다. 상류계급의 주택가도 예외는 아니다. 아이들도 안전하지 않았다. '옷을 벗기는 도둑'이 횡행하였다. 대개 여자였는데 골몰길로 어린이를 데리고가서 옷을 빼앗았다.
●혹독하고 비정한 18세기 인간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위에서 밑바닥까지 사회 전체가 현대서구 세계인의 눈으로 보면, 극단적으로 잔혹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원리로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어린이나 동물에 대하여 현대가 당연시 하는 보호를 빅토리아조 초기의 인간이 보면, 틀림없이 우스꽝스럽다고 여길 것이다. 닥터 존슨이라면 이것을 위험한 감상주의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전기작가 보스웰(Boswell, 1740-1795)은 <존슨전>에서 다음과 같은 취지를 밝히고 있다. 1780년대에 타이번(런던의 사형 집행장 - 역주)폐지론이 대두되었는데 여기서 행하여지는 공개처형이 휴일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도둑질로 어린이가 교수형을 당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존슨은 이 폐지론을 단호히 반대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체형은 구경꾼을 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구경꾼이 모이지 않으면 목적은 달성되지 않는다‥‥"
이 시대에 관하여 영국의 어느 범죄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이들은 주정뱅이 부모나 교구의 보모 밑에서 굶주리고 있었다. 도둑질을 해오라고 밖으로 쫓겨나기도 하였고 여자아이는 매춘을 하도록 강요당하였다. 그 대부분은 열두 살도 안 되었다. 성병에 걸려 '반미치광이'가 되는 어린이도 많았다. 어린이는 구걸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사람들의 연민을 사기 위하여 일부러 상처를 내거나 불구로 만드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사람들의 연민을 사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이 시대의 연민은 아직 기묘하고 고귀한 감정일 따름이었다. 바라지 않는 아이가 태어나면 곧 거리에 갖다버려 죽도록 놓아두었다. 그렇지 않으면 분뇨더미에 처박히거나 배수구에 내던져졌다. 동물학대는 인기가 높은 스포츠였다. 고양이로 캐치불을 하고 곰이나 소를 매놓고 맹견을 부추겨 덤벼들게 하는 것들은 각지에서 오락으로서 인기를 모았다(크리스토퍼 히버트의 <악의 뿌리>에서).
위험은 동물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잉글랜드는 외국인에게도 냉혹한 땅이었다. 외국인이 런던 거리를 걸어가면, 그 고장 사람들은 이리저리 훑어보고 진흙을 집어던졌다. 어느 포르투갈인이 본토 태생의 뱃사람과 싸움을 하던 중 귀를 벽에 대고 못질을 당하였다. 그 못을 간신히 뽑아내자. 군중이 모여들어 그를 구타하고 칼로 찔렀다. 구경거리로 끌려나온 죄인에게는 돌세례가 기다리고 있었으며 대개는 그것으로 목숨이 끊겼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만행이 하층계급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런던에 모호크라는 비밀 결사가 있었다. 그들은 '같은 인간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위해를 가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대부분이 상류계급의 자제들이었다. 그들이 남아도는 여가시간에 정열을 쏟은 것은 다음과 같은 소행이었다. 매춘부나 노파를 타르통 속에 거꾸로 매달고 칼로 그 다리를 쿡쿡 찌른다. 혹은 칼날을 위로 세워놓고, 그 위로 여자를 몰아넣어 껑충껑충 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흥겨워한다. 여자의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벤다. 가정부를 숨어서 기다렸다가, 윈첼시 부인의 가정부의 경우처럼, 때려뉘고 안면을 난도질 한다. 그들은 사냥감에 대한 잔학한 사기를 돋구기 위하여 우선 얼큰하게 마시고, "이성이니 인간성이니 하는 것들이 자신에게 남아 있을 가능성을 떨쳐버렸다." 모호크단 중에는 볼드벅단의 멤버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 결사는 신의 존재를 공공연히 부정하고 일요일마다 홀리 고스트 파이라고 부르는 것을 먹었다. 그들의 소행은 모호크단에 비하면 두드러지게 성적인 점이 특징이었다. 한편 능욕·폭행의 증거를 확인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그들의 평균연령은 12세였기 때문에, 이 그룹의 만행은 그야말로 자유방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였다 (크리스토퍼 히버트의 <악의 뿌리>에서).
●소녀능욕, 그리고 아이에 대한 교수형
<나의 비밀스런 생애>라는 빅토리아조의 작가미상의 자서전이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작가는, 매춘업에 종사하는 한 중년 여주인과 열 살 난 소녀를 보그졸 공원에서 주워서, 그 계집애를 몇 번 자기 것으로 하였다. "오! 다른 사람은 아저씨처럼 하지 않아요." "조용히 해라, 꼬마야. 상처는 내지 않을 테니까." 이어 작가는 희희낙락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이 계집애에게 상처를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내 연장으로 그녀를 울부짖게 한다. 가능하면 그녀에게 피를 흘리게 한다."
<나의 비밀스런 생애>의 작가를 재판할 경우에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소녀가 두 살만 더 나이가 먹었더라면 성관계를 맺는 일이 합법적이라는 사실이다. 이 연령을 13세로 끌어올리는 데는 1875년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아서 캐스틀러(Arthur Koestler)와 C. H. 롤프(Rolfe)의 공저 <교수형>(1961)에 의하면, 그보다 50년 전에도 아이들은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감옥선'에 실려 식민지로 보내졌다(아동용의 특별한 수용소가 있었으며, 이것은 1844년까지 사용되었다).
1810년에는 스푼을 훔친 남자아이가 교수형을 당하였다. 1808년에는 8세와 12세의 자매가 올가미로 교수되었다. 1831년에는 13세의 소년이 집에 불을 질렀다는 죄로 첼름스포드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1833년에 9세의 소년이 진열창의 틈새로 막대기를 집어넣어 2펜스 상당의 인쇄 잉크를 훔친 것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이것은 정상이 참작되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집없는 아이가 거리를 돌아다니면 부랑죄로 체포되고, 이로 인해 특별한 시설을 갖춘 감옥으로 송치될 수도 있었다.
<19세기의 범죄>에서 저자 J. J. 토비어스는 1936년의 감옥 검사관의 보고서를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뉴게이트의 아동용 감옥에는 24명이 수용되어 있다. 그 중의 7명은 주인의 물건을 슬쩍하였고, 한 명은 부친의 것을, 한 명은 숙모의 것을 훔친 죄이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겨우 사회의식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주로 영국의 디킨스(Dickens, 1812-1870)나 프랑스의 빅토리 위고(Victor Hugo, 1802-1885) 등의 인간성 존중을 테마로 한 작가들의 영향이었다. 이 변화를 가져온 것에 대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이 사실은 제법 흥미롭다. 앞에서 언급한 보스웰은 공개처형의 폐지에 관한 닥터 존슨의 의견을 기술한 페이지의 앞 장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한 인간이었다. 또한 슬픈 시에도 커다란 감명을 받은 듯싶다. 닥터 피티의 <속세를 떠난 사람>이라는 시를 내가 보는 앞에서 읽으면서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필시 이 '슬픈 시'가 타이번에 관한 존슨의 견해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무자비성
1850년대에 이르자, 문명세계 사람들은 가엾은 넬(디킨스의 작품 <골동품점>의 주인공 - 역주)이나 사랑 때문에 죽은 콰지모도(위고의 작품 <노트르담의 꼽추>의 등장인물 - 역주)의 운명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1862년에 몇몇 부족의 인디언들이 미네소타주에서 횡포한 행동을 저질렀는데 - 토지를 사취당하였다고 생각한 것이 그 원인 - 그 이야기는 아이가 받은 고통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날의 주인공은 머틴 이스트릭이라는 11세의 소년이다. 소년은 1년 3개월 난 남동생을 등에 업고 80킬로미터나 걸었는데, 일사병과 피로와 허기로 죽었다. 아버지 이스트릭은 이미 살해당하였다. 어머니는 총알을 맞고 쓰러져서 빈사상태였는데 그녀의 두 아들 플레디와 프랭크가 곁에 있었다. 두명의 인디언이 이들을 붙잡아, 꼼짝도 못한 채 쳐다보고 있는 어머니 앞에서 때려 죽였다. 많은 아이들이 얻어맞고 축 눌어진 채 버려져 있었다. 이 아이들도 허기와 악천후로 숨을 거두었다(저지 벅의 <인디언 폭동사>에서, 토머스 듀크의 <미국의 저명범죄>에서 재록).
이 흉악한 난동으로 아메리카인은 인디언의 토지를 빼앗고, 그들을 일정한 거류지로 몰아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희생자는 인디언이라는 것이 현대의 공통된 인식이다. 인디언은 그때까지 수백 년 동안 해오던 대로 행동한 것에 불과하다. 다음에 인용하는 역사는 프랜시스 파크맨(Francis Parkman)의 글로 분명해지듯이 그들의 잔혹성은 전사가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던 요소 중 하나였다.
적에 대한 가차없는 냉엄함은 전사가 몸에 지녀야 할 본질적인 성격이었다. 연민은 겁쟁이의 속성으로, 그들은 긍지를 가지고 이를 물리쳤다. 그들은 항상 동료의 칭찬을 구하고 멸시받을까봐 두려워하였다. 동정심은 모두 억제하였다. 여기에 타고난 과격함이 첨가되어, 거의 유례가 없는 잔혹한 성격이 형성되었다(프랜시스 파크맨의 <충돌의 반세기>에서, 존 앤드루 도일의 <수상록>에서 재록).
여기에는 '남경 대학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전사의 심리와 '체면을 세우는' 상황이 존재한다. 존 앤드루 도일은 파크맨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인디언의 잔혹성은 그 당시의, 혹은 현대 문명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도일이 말하는 인디언은 초기시대의 인디언으로, 그 무자비성은 백인 정복자의 무자비성과 어느 정도 연계된 점이 있다.
파크맨은, 프랑스인에게 고용된 인디언들이 영국인 이주자들게 가한 학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주로 여자와 어린이로 이루어진 104명의 주민들이 잠옷 바람으로 침대에서 끌려나와 토마호크(인디언의 전투용 큰 도끼 - 역주)에 맞아 죽거나 사살당하였다. 혹은 좀더 고통이 큰, 서서히 죽이는 방법으로 살해당하였다." 학살이 끝나자, 인디언을 수행해 온 예수회의 신부가 위령 미사곡을 불렀다. 프랑스인이 인디언을 고용한 것은 백인 병사보다 값이 쌌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디언의 살인방법에도 일체 참견하지 않았다.
프랑스인 신부는 연락처에 다음과 같이 보고를 하였다. "그들은 보이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인다. 부인과 처녀는 능욕한 후에 때려 죽이거나 태워 죽인다." 파크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랑스인은 포로가 고문당한 끝에 산 채로 불에 타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포로를 인디언에게 건네주었다."
●엘리자베스조 시대의 난파선 해적
이것은 미네소타주에서 수족의 난동이 일어나기 이전 세기의 이야기이다. 한편 영국인도 적에 대한 잔혹성에 있어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이래, 장기간에 걸쳐서 스페인과 패권을 다투었다. 정부는 약탈자라는 해적이 스페인 선박을 희생물로 삼는 것을 적극 장려하였다. 배가 습격되면 종종 배의 승무원들은 몰살되었다. 한편 연안지방의 촌락에도 바위 위에 가짜 등불을 설치하여 타국 선박을 난파시키는 일을 장려하였다. 앞서 이야기한 <악의 뿌리>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이리하여 난파당한 배의 선장은 체셔주의 해안에 간신히 헤엄쳐 다다랐다. 그런데 대기하고 있던 마을 사람은 그의 옷을 벗겨 빼앗고, 반지를 빼내려고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어떤 뱃사람은 귀고리를 달고 있었기 때문에 귀가 잘려나갔다. 1753년에 이르러 이런 종류의 '난파유도' 행위는 중죄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영국의 선박과 타국의 선박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적행위와 산적행위가 유럽에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통설로는 바빌로니아 아카드 왕조의 창시자 사르곤(B. C. 2350년경)의 시대라고 보고 있다. 기원전 제 3,000년기의 말엽이다. 주위에 성벽을 두른 최초의 도시는 사르곤으로부터 다시 600년을 거슬러올라간다. 이 무렵의 전쟁이 예외적이 아닌 일반적인 상황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Gordon Childe, 1892-1957)는 저서 (역사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에서 에게해의 작은 섬들(키클라데스 제도)의 당시 무덤 속에 많은 금속제 무기가 있음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이 섬들의 당시 사회는 해적행위와 평화로운 교역을 함께 해서 이윤에 약탈품을 가산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이후 오랜 시대에 걸쳐 지중해에서는 예사로운 일이 되었다."
사르곤왕이 행하였던 것 같은 대규모 전쟁에서는 군대가 지나간 전 지역에 동요를 가져와 전쟁에 필수적으로 뒤따르는 약탈과 폭력행위의 자취를 그 지역에 남겼을 것이 틀림없다. 작은 도시나 부족이 큰 제국에 통합되면 주체성의 상실감이 고조된다. 이것은 이크족의 경우처럼 자기 중심주의와 무자비성의 조장과 관계가 있다. 생활의 근거가 되는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필사적으로 살아남을 수단을 모색한다. 왕이 도시를 파괴하고 병사들에게 약탈과 능욕이 하용되면, 일부 사람들의 생활이 더욱 난폭한 태도로 기울어지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M. E. L.말로웬은 논문 "문명생활의 여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문명의 단위지역이 저마다 광범위하게 접촉하기 시작하자, 인간이 손에 넣을 수 있는 부의 혜택에 자기도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과, 이것을 경쟁을 해서라도 손에 넣고자 하는 결의를 촉구하게 되었다(스튜어트 피고트편 <문명의 여명>, 템스 앤 허드슨사판, 1961년에서).
●지중해 지역의 해적행위
이리하여 지중해 지역이 차츰 격동의 도가니로 되면서 폭력시대의 막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지중해 지역에 있어서의 해적행위와 산적행위의 발생에 대하여는 유감스럽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B. C. 460-400)는 기원전 5세기 말엽에, 그로부터 1,000년 이상이나 앞선 시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풀이를 시도하고 있다.
고대에 있어서는 그리스인이나 야만인이나, 연안지방의 주민이나 혹은 도서지방의 주민이나 할 것 없이, 바다를 이용한 상호 왕래의 길을 터득하게 되자 해적행위에 의지하기 시작하였다. 힘센 자가 우두머리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자기의 지휘하에 두었다. 우두머리들은 부를 축적하고 자기가 지배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제공하는 수단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산재해 있는 성벽 없는 도시나 촌락을 습격하여 이를 약탈하였으며 이 행위로 스스로의 위세와 생활을 유지하였다. 당시에 이런 종류의 행위는 치욕이 아니라 명예로 여겨졌다. 이것은 본토의 몇몇 종족이 해적행위로써 오늘날까지도 번영하고 있는 사실로 증명된다.
또한 고대시인의 작품에는 낯선 항해자에 대해 "너는 해적이냐?" 라는 질문이 자주 나온다. 질문을 받은 쪽은 이것을 별로 부정하지 않는다. 한편 질문한 쪽도 이 직업을 비난하지 않는다. 여러 지역은 도적떼에 의해서도 오염되고 있었다. 헬라스에는 옛 습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지역이 있다‥‥ 즉 무기를 휴대하는 본토민의 습관은 고대의 약탈습관의 잔재라고 생각된다. 고대에 있어서는 집은 무방비 상태이며, 왕래도 안전하지 못했으므로 모든 그리스인은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투키디데스는 지역의 우두머리가 바다를 건너 무방비의 촌락을 습격하여 필시 그곳 주민의 일부를 노예로 끌고갔을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해적행위는 전쟁의 한 형태로서 간주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명예였다. 거기에 무차별의 학살과 잔혹한 행위가 뒤따랐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해적행위가 용납될 리가 없고, 명예로 간주될 리도 없다. 이 사람들은 단순하고 자기 감정에 솔직하며, 과격한 사람들이었으나 사디스틱하지는 않았다. 아테네의 안전지대에서 '야만인'을 바라보는 투키디데스에게는, 서부의 황야에 대하여 논평하는 뉴욕의 평론가다운 말투도 있다.
투키디데스는 크레타섬의 전설적인 미노스왕이 지중해의 대부분을 정복하여 바다에서 해적을 소탕했다고도 말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미노스왕은 미궁을 건조하고, 그 아내가 황소와 통정하여 머리가 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다고 전해지는 왕이다. 미노스왕은 제우스와 처녀 에우로페 - 그녀도 황소의 성기에 매혹당한다 - 의 아들이기 때문에 19세기의 역사학자들은 이 인물을 신화적 존재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900년에 아서 에번스(Arthur Evans)라는 영국인이 크레타섬의 크노소스(크레타섬의 옛 도시 - 역주)발굴을 개시하여, 거대한 궁전의 벽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 벽의 규모와 호화로운 장식으로, 이것이 위대한 문명의 유적임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이 있었다. 이 궁전은 바다에서 상당히 가깝지만, 방어용의 성벽은 전혀 없는 듯하였다. 이곳의 주민은 분명히 해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규모의 배수로의 유적이 그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가 되었다. 크레타섬은 해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궁전의 방들이나 복도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에번스는 미궁 전설의 기원을 발견했다고 생각하였다. 벽화에는 소의 등을 뛰어넘는 젊은 남녀가 그려져 있다. 크레타인(에번스는 미노스인이라고 부른다)은 소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궁전 지붕에는 두 개의 돌조각이 있는데 소의 뿔 모양 같다. 결론을 말한다면, 미노스왕은 실존하였고, 전승이 사실에 의거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많이 나왔다.
●미노스왕과 미노타우로스 전설
후세의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46?-120?)도 미노스왕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미노스왕의 아들이 그리스인에게 살해되었다는 것, 격렬한 전투 끝에 미노스왕이 7명의 젊은이와 7명의 처녀를 9년마다 제물로 받아들이는 데 동의한 일, 이들은 미궁에 갇혀 살고 있는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쳐졌다는 것, 아테네의 왕자이며 영웅인 테세우스가 크레타섬에 가서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일 등이다. 에번스는, 아테네의 인질들이 필시 소의 신에게 바쳐지거나 또는 소를 상대로 하는 투기시합에 동원되었다고 생각하였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이 영웅 테세우스는 아주 젊은 시절에는 아테네 근처의 거리에서 도적떼를 소탕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당시 아테네로 통하는 육로는 매우 위험했었다. 도적이나 살인자가 없는 길은 없었다." 도적 중에 파이아라는 이름의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 "아주 극악무도하며‥‥ 몹시 난폭한 생활 때문에 '암퇘지'라는 별명이 붙었다."이것이 인류의 범죄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인이다. 테세우스는 스킬론 이라는 이름의 산적도 처치하였다. 나그네에게 자신의 발을 씻으라고 명하고, 나그네가 몸을 굽히면 그를 바위에서 차서 바다로 떨어뜨리는 수법을 늘상 쓰던 산적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바다에서 해적을 소탕하는 임무가 주어진 이아손이라는 인물(미노스왕 시대의 전설적인 영웅의 한 사람 - 역주)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이상을 감안하면, 사실과 픽션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기는 곤란하지만, 미노스라는 이름의 왕이 기원전 1600년경에 실재한 것은 분명하다. 또 그 무렵 해적행위와 산적행위가 지중해 지역에서는 아주 보통이었던 것도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크노소스는 최종적으로 기원전 1380년경에 해적과 그 밖의 약탈자에 의해 멸망한다. 이 시대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대였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악하고 잔혹하지 않을수 없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일은, 이 초기시대의 해적은 후세의 지중해를 휩쓸고 다니던 '흉악한 쥐'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전사라고 자부하였다. 그들이 쫓아다닌 것은 손쉬운 약탈이었다. 당시 문명은 확장일로에 있었고 지중해 지역은 독자적인 번영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해적이 다른 부류의 인간들에게서 덕을 보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기원전 15세기와 14세기의 지중해 세계는 '봄의 시대'였다.
●미케나이의 큰 왕국
크노소스가 멸망한 후에, 아카이인이라는 사람들이 미케나이 지역에 성채를 쌓기 시작한다. 그들은 북쪽에서 그리스로 남하하였다. 미케나이의 방어용 성채는 거대한 암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후세의 그리스인은 이것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거인족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키클롭스(거인)라고 불렀다. 미케나이도 크노소스와 마찬가지로 번영하였다. 그리스군을 이끌고 트로이를 공략한 아가멤논은 미케나이의 왕이다.
트로이서으이 함락은 기원전 1184년경으로, 전승에 따르면 개선한 아가멤논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그녀의 정부에게 살해당한다. 아무튼 아가멤논 왕국은 이 위대한 왕이 죽은 후 그리 길게는 유지되지 않는다. 도리스인이라고 불리는 침략자가 북쪽의 도나우(다뉴브)강 지역으로부터 남하하여 이 위대한 문명도 이윽고 멸망한다. 이에 잇따른 300년간은 암흑시대라고 보고 있다. 다만 로마 제국 붕괴 후의 유럽의 암흑시대처럼, 새로운 미개민족에 의한 침입시대는 아니다. 이 시대의 자료가 극히 빈약하다는 의미에서의 암흑시대이다.
미노스나 아카이아와 같은 큰 왕국은 이 시대에는 출현하지 않는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수십 개의 소도시를 거느리는 작은 나라가 산재하였을 뿐이다. 바다에는 여전히 해적이 횡행하였지만 약탈의 성과는 극히 빈약해졌다. 아킬레우스나 오딧세우스와 같은 전사 우두머리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설치는 것은 언제나 배고픈 조무래기 패거리였다. 소도시나 촌락에서는 부유해질 기회가 없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반은 굶주리고 있었다. 육류는 축제일에만 구경하였다. 그 밖의 인간은 과일과 올리브와 보리죽으로 연명하였다. 그러나 이 가난한 촌락에서도 겨울을 대비하여 식료품을 비축하고 있는 한은 해적도 어느 정도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한편 해적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동기가 있었다. 능욕이다. 이 시대에 대하여 N. K. 샌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샌더스의 <바다의 주민들>에서). "영웅적 행동의 목적은 오로지 약탈이다. 금, 은, 청동, 말, 소, 양, 여자, 특히 재화와 여자였다." 재화가 적더라도 여자를 폭행·능욕할 수 있다. 작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정조관념이 강하다. 그들도 예외는 아니다. 결혼하기까지는 딸이 처녀이기를 바란다. 한편 남자에게는 본래 난교의 경향이 있다. 따라서 능욕이 해적행위의 즐거운 보수의 하나였음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여자를 소유하면 언제든지 노예로 팔아버릴 수 있었다. 이 시대도, 그리고 그후에도 장기간에 걸쳐 문명생활의 저변에는 노예제도가 있었다.
●개인주의의 발달
호메로스 이후의 시대는 말할 것도 없이, 제인스가 말하는 '마음의 이중구조의 붕괴' 시대이다. '자의식의 자각'에 관한 이 학자의 설을 인정하느냐의 여부는 별도로 하고, 이 시대가 개인주의의 융성기였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대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소도시나 촌락의 주민은 왕(또는 우두머리)의 지배에 싫증이 나서, 지도력 있는 시민으로 구성된 평의회의 지배를 구하기 시작한다. 즉 과두정치이다. 그러나 이 평의회도 곧 '특권층'의 것이 된다. 시민층은 이것에 불만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불만이 민중 선동가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들은 귀족정치를 공격하고, 칼이나 곤봉을 든 소수의 동지를 규합하여 마침내 압제자나 폭군으로서 군림한다. 그러나 개인주의의 사고방식을 몸에 익힌 그리스인은 결국에 가서는 이 압제자를 물리친다. 그 결과 여기에 세계최초의 민주주의가 탄생한다. "
이 사고에 따르면, 개인주의는 코노소스나 미케나이와 같은 큰 도시를 소멸시키고, 이에 대신하여 소도시나 촌락을 발생하게 한다. 그러나 소도시나 촌락은 기원전 6000년부터 존재하였고, 왕이나 승려 지도자의 지배를 평화리에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스에 있어서의 새로운 개인주의는 새로운 평화리에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스에 있어서의 새로운 개인주의는 새로운 종류의 자의식을 융성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의식은 후에 과학과 철학을 낳는다. 혹독하고 위험한 시대를 오래 견디어내고 살아남은 종족은 폐소공포증적인 작은 사회를 형성하여, 외부세계를 일종의 불신감을 갖고 보게 된다. 경계심과 의지력이 그들을 '좌뇌인간'으로 만든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압제자의 지배로 인하여 그리스인은 자유에 대한 동경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압제자에게는 지배자나 왕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잔혹성의 의미는 없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B. C. 484?-425?)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상층에 속한 인간이라도 권력을 장악하면, 사고의 흐름이 일변하게 마련이다. 그 지위로 인하여 그의 마음속에는 오만이 자라게 된다. 그리고 또 시기심도‥‥ 이 두 가지가 마음에 깃들면, 그에게 온갖 악이 충만하게 된다. 왜냐하면 오만은 그로 하여금 많은 포학한 행위를 하게 하며 시기심도 더욱 많은 포악한 행위를 하게 한다(<역사> 제 3 권에서).
인간을 생매장하여 개를 부추겨 달려들게 한 페레의 압제자 알렉산드르에 대하여는 뒤에 말하는 대로이다. 시칠리아섬의 아크라가스의 폭군 팔라리스는, 자기가 싫어하는 인간을 소 모양의 청동제 냄비에다 로스트 구이를 하는 소름끼치는 취미로 유명했었다. 최초의 희생자는 이 냄비를 만든 공장 이었다. 이 폭군은 후에 실각하여 자신도 그렇나 죽음을 당한다.
●자기 자식을 먹게 한 폭군
압제자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불신감은,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B. C. 600년경) 경 관한 소름끼치는 에피소드에도 짙게 나타나 있다. 왕은 자기 손자에게 왕좌에서 쫓겨나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하르파고스라는 한 노예에게 이 손자를 건네주며 이 아기(이름은 키루스)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하르파고는 이에 충격ㅇ르 받았다. 그때 마침, 방금 자기 아기가 숨이 막 끊어진 한 양치기가 있었다. 이 양치기에게 키루스를 맡기고 숨진 아기를 아스티아게스왕의 호위병에게 보이며, 왕의 명령이 실행되었음을 확인시켰다.
그 아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신분이 탄로났다. 또래와의 놀이에서 그는 왕이 되었다. 키루스는 자기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귀족의 아이들 때렸다. 이 소문이 아스티아게스의 귀에 들어갔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키루스를 궁전에서 대면하였다. 자기와 꼭 닮았다. 양치기를 심문하여 진상을 밝혀냈다. 이윽고 하인 하르파고스는 저녁식사에 초대되었다. 13세의 외아들도 궁전으로 같이 오라고 명하였다. 소년은 즉시 살해되어 난도질을 당하고 로스트 구이가 되었다. 하르파고스는 저녁식사 테이블에 앉아, 차려 놓은 고기를 먹었다. 자기 자식의 고기를! 식사 후에 그에게는 바구니가 주어졌는데 거기에는 아들의 두 손과 두 다리와 머리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의 특징은 이에 대한 하르파고스의 반응으로 더욱 뚜렷해진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말하였다. "왕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옳으십니다." 하르파고스는 절대복종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식을 먹은 것을 알았더라도 감정을 숨기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한편 아스티아게스도 신하측의 절대복종에 익숙해 있었다. 따라서 하르파고스가 자기에게 악의를 가지리라고는 생각해보지도 않는다. 여기서 갑자기 상기하게 되는 것은 이 페르시아의 왕과 그로부터 2,000년 전의 이집트나 수메르의 왕들 사이의 크나큰 거리감이다. 이집트나 수메르의 왕은 자신을 신의 종복이라고 생각하였다. 법률의 규칙에는 신하와 마찬가지로 따랐다. 한편 아스티아게스는 잔혹한 인간은 아니었다.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촉발된 것은 그의 자아였다. 그는 '적절한' 처벌을 냉정히 계산한 것뿐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다시 한 번 밝혀두고 싶다. 이런 종류의 잔혹성은, 이제 스스로 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인간의 '분리된 의식'의 결과라는 것을. 그러나 이와 같은 분리된 의식이 결국에는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라토스테네스의 작업을 이끌어주게 된다. 분리된 의식은 민주주의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신의 의지에 의하여 결합되는 것이 아닌, 홀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정치형태이다.
그와 같은 민주주의는 신에 대한 불경죄(천의 작은 에고의 집합은 하나의 작은 에고라는 주장)로 간주되어 소크라테스는 처형되지만 이로 인하여 결함도 드러난다. 좌뇌의 자의식은 인간을 고정관념으로 몰고간다. 고정관념은 맹목과 편협, 잔혹성과 무분별의 온상이 된다. 그러나 같은 관념이 과학과 철학을 낳게 한다. 결국 역사의 추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지금도 계속 요동하고 있다. 즉 문명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창조력과 범죄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모험담을 즐김 :드라마의 탄생
이 책의 중심 테마는 범죄이다. 그러나 창조력을 무시하면 범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류사 전체의 의미도 파악할 수 없다. 크레타섬을 침입하여 미케나이를 건설한 그리스인은, 모험을 구하는 인간 고유의 감정에 이끌려 그곳으로 왔다. 정복이 없는 인생은 따분할 뿐이었다. 이 감정에 이끌려 그들은 희희낙락 적을 죽이고, 붙잡은 여인을 능욕하고, 무방비의 도시를 약탈하였다. 그것은 본질적인 악은 아니었다. 사내아이가 해적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로부터 4세기 후, 호메로스라는 장님 음유시인이 옛날의 전쟁담을 낭송해 들려주는 시대가 되자, 청중은 난롯가에서 몸을 달싹도 않고 모험의 흥분을 즐길 수 있었다. 어느 의미에서는 옛날의 영웅들보다도 그들 쪽이 모험을 더 즐기고 있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나날의 사건에 대처하기보다는 옛날을 회고하는 편이 훨씬더 즐겁다.
노래와 낭송에 대한 세상의 취미는, 아테네 최초의 위대한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재위 B. C. 561-528)의 지배시대에 이르러, 디오니소스 제전과 같은 일종의 가창 콘테스트로 발전하였다. 합창단의 리더가 하는 짓이 좀 이상하다. 자기가 불러야 할 대목을 부르지 않는다. 자기가 노래하는 전설의 영웅이 된 듯한 시늉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새로운 연출방법 쪽이 단순한 이야기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청중은 이로 인하여 트로이의 함락, 아가멤논의 암살, 오이디푸스나 필로크테테스의 비극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새로운 방법의 고안자 테스피스(Thespis)는 이때 연극을 발명한 것이다.
이로부터 1세기 후 1만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극장이 아크로폴리스의 기슭에 건설된다. 연기자는 키가 크게 보이게 하는 구두를 신고 걸어다니며, 소리를 중폭하는 목제 마스크를 사용해 발성함으로써 과거의 위대한 드라마에 재차 생명을 불어넣는다. 극장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고, 연기자의 목소리를 청중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는다.
이 황금시대에 시뿐 아니라 과학과 철학의 꽃이 돌연 피었다고 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리하여 인간은 인간의 가장 독특하고 믿기 어려운 능력을 겨우 만나게 된다.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사는 능력이다. 현실의 세계와 상상의 세계를. 이것은 스파르타인이 결코 몸에 익힐 수 없는 허구였다. 이 사람들은 고정관념이 가리키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B. C. 356-323)은, 기원전 2350년경의 바빌로니아의 아카드 왕조 초대의 사르곤 대왕이나 미노스왕을 이끈 정치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스스로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세계정복의 길에 나섰다. 그는 영웅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의식한 최초의 영웅이었다. 그는 무대에서 배우가 연기를 하듯이 정복자를 연기하였다.
●아풀레이우스가 그리는 도적의 모습
그러나 이 시대의 범죄자, 즉 산적이나 해적은, 아직 트로이 전쟁의 초기단계의 성격을 남기고 있었다. 필자가 아는 한 에서는, 범죄는 아직 사디즘의 단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필자가 아는 한에서는, 범죄는 아직 사디즘의 단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를테면, 침대의 길이에 맞도록 나그네의 몸뚱이를 두들겨 늘이거나 끝을 잘라냈다고 전해지는 전승의 노상강도 프로크루스테스와 같이, 잔혹함으로 이름을 떨친 해적이나 산적의 경우에도 그 행위의 기록에는 틀림없이 과장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들처럼 우리들의 선조들도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로 배를 채워 만족해하는 상태는 여전히 요원하였다.
기원전 400년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배를 당하자 해적은 바다로 되돌아가고, 산적은 길거리로 되돌아갔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 때문에, 그것 외에는 달리 살 길을 찾을 수 없는 병사들이 거리 곳곳에 출몰하였다(10만 명이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 - 앞에서 어린이로 등장했던 키루스 대왕의 자손 - 에게 고용되어, 키루스가 전투에서 죽기 전까지 페르시아 각지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그후 그들은 이름도 잊혀진 아시리아의 광대한 폐허 도시를 지나, 내내 전투를 하면서 바닷길로 퇴각하였다).
그로부터 3세기 후의 제정 로마기의 작가 루시우스 아풀레이우스(Lucius Apuleius)는 소설 <황금의 나귀>에서 나귀로 변신한 영웅을 생포한 도적을 주인공으로 한다. 이 도적떼는 칼과 도끼로 무장하고 어느 집 뒤뜰로 침입한다. 거기서 귀중품을 간수하고 있는 경계가 엄중한 방으로 들어가는데 그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귀중품의 일부를 영웅(나귀)의 등에 싣고 급히 퇴각한다. 도적떼는 자기들의 동굴로 돌아가서는 먼저 더운 물로 몸을 씻고, 노파가 요리한 호사스러운 음식 앞에서 긴장을 풀고 술을 마신다. 그들은 노래를 불러대고, 서로 추잡스러운 이야기를 큰소리로 지껄이며 동담을 주고 받았다. 마치 트로이의 성벽을 앞에 두었을 때의 그리스군과 같은 분위기이다.
식사를 마친 후 도적때의 우두머리는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그날의 성과의 일부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이것은 도적떼의 용기와 강인함을 부치기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 두령의 이야기인데, 그는 문에 구멍을 내서 손잡이를 찾아보려고 안을 두리번 거리며 들여보았다. 이때 그 집 주인이 망치를 들고 두령의 손을 못으로 문에 박아버렸다. 달아나려면 팔꿈치 언저리를 끊어야만 하였다. 도망을 치는데 두령은 차츰 늦어지기 시작하였다. 붙잡히면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 것을 알고 있는 두령은 자신의 칼로 자살하였다. 동료는 깊이 감동하여 그의 시체를 외투로 싸서 냇물에 떠내려보냈다.
다음은 산적의 이야기이다. 어느 산적이 노파의 침실로 침입하였다. 노파를 목졸라 죽이지 않고, 그녀의 물건을 모두 창밖으로 던졌는데 거기서 그의 동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최후에 노파의 침실로 침입하였다. 노파를 목졸라 죽이지 않고, 그녀의 물건을 모두 창밖으로 던졌는데 거기서 그의 동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최후에 노파의 침대를 내던지려고 하였다. 이때 노파는 계략을 생각해냈다. 산적이 물건을 던진 곳은 이웃집 뒤뜰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산적은 아래를 보기 위하여 창밖으로 몸뚱이를 내밀었다. 그 순간 노파는 그를 밀어 떨어뜨렸다. 산적은 돌에 부딪혀 늑골이 부러졌고 곧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다른 동료가 계단을 뛰어 올라와서 원수를 갚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먼저 말한 옛날 도적떼의 두령처럼 냇물에 떠내려보냈을 뿐이다.
뒤에 이 도적떼는 다음 약탈을 위해 출동했다가 아름다운 여인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능욕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여인에게 말한다. "당신은 안전해요, 부인. 다치게 할 생각은 없소. 몹쓸 짓을 할 생각도 없소‥‥" 아풀레이우스가 묘사하는 도적떼의 이야기에 연극적인 분위기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작가 아풀레이우스에게는 일종의 야만적인 리얼리즘이 짙게 깔려 있다. 그렇다면 이 경우 일부러 격조를 낮추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모험자의 쇠퇴
아풀레이우스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도적들이 자기자신을 모험자라고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삶을 가능한 한좋은 상황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노파를 목졸라 죽인다. 숨통을 잘라버린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고문도 불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잡히는 날이면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 훨씬 뒤의 세기에서 말도둑이 린치를 당한 것과 같다. 사실 이 시대의 도적이나 해적 이야기는 후세 미국의 서부 황야 이야기와 일맥상통한 옛날의 좋은 시대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이제 '의적'의 모습은 없다. 이때의 상황을 어느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생 도시국가가 차츰 강력해지자, 도적때 등의 은신처에 손을 뻗지는 수단이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산악지대를 탐색하여 산적의 소굴을 소탕하러 나섰다. 그리스에서는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석회암 동굴이다. 때로는 언덕의 비탈, 눈에띄지 않는 후미진 곳에 있기도 하다. 미로와 같은 복잡한 통로를 지나면 천장이 높은 광활한 공간이 나온다. 옛날에 도적떼가 근거지로 삼아 술을 마시며 떠들고, 신에 대하여 제단을 조각한 장소이다. 거기에 지금은 조용한 시민이나 양떼를 몰고 찾아온 양치기들이 이야기도 하고 피리를 불기도 하고 낮잠도 잔다‥‥ 해적도 지금까지의 은신처를 떠나야만 하였다. 이를테면 만의 변두리에 있는 바위 많은 섬이나 작은 배가 드나드는 곳에 안성맞춤인 동굴이 있다. 맑은 물을 뿜어올리는 샘도 있다. 이와 같은 장소는 모두 도시의 행락지가 되었다. 산악지대에 눈이 내리는 겨울에는 특히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소수의 무모한 자만이 세상의 흐름에 저항하여, 법률이 미치지 않는 육지의 오지로 깊숙이 이동하였다. 이리하여 모험자와 정직한 시민 사이의 단절은 차츰 심화되었다(엘프레드 지만의 <그리스 자치국가> 제3부 4장에서>.
이리하여 아테네의 황금시대 후에는 지중해 세계의 서서히 문명이 침투하여, '모험자'로서의 직업이 계속 유지되기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리스인은 모든 지역에 문명을 전파하였다. 이를테면 '송아지의 땅'이라는 뜻의 비텔리우(Vitelliu)라는 반도의 푸른 평야지역에 사는 미개민족에게도 그러하였다. 이 낱말은 훗날 첫 자와 끝자가 떨어져 나가 이탈리(Italy)로 된다. 이 종족은 나라 이름 라티움을 따서 라틴인이라고 불리어졌다.
기원전 900년에는 낮은 언덕에 도시를 만들었다. 그들은 에트루리아인이라고 불리는 신비적인 동양계 인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전에는 일곱 언덕의 도시를 정복했지만, 당시는 라틴인의 북방에 살고 있던 종족이다. 그후 에트루리아인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 출현도 소멸도 수수께끼에 파묻혀, 아직 해명되지 있지 않다.
이 도시는 그후 1,000년에 걸쳐 인류진보의 중심지가 된다. 다만 그것이 진짜 진보라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만일 신이 이집트인, 아카드인, 미노스인, 아시리아인, 마케도니아인 등의 도시와 위대한 제국이 건설된 이래, 인류역사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었더라면 그 굴곡이 심한 도정에 대해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체로 만족스럽게도 여길 것이다. 인류에게 '이중의식'을 제공한 도박은 이제 겨우 수지가 맞는 단계를 맞으려 하고 있다.
로마인이 등장하자 역사는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다. 이중의식으로 인하여 '일어날 수 있는' 악은 모두 일어난다. 이 종족은 기원 500년경에 역사의 주무대에서 퇴장하게 되지만, 기묘하게 얽힌 두 가지 유산을 인류에게 남긴다. 문명과 범죄이다.
2. 비열한 도시가 아니다.
●노예와 살인자가 건국한 로마
사람들은 이 도시를 로마라고 불렀다. 로마 시민은 기질적으로 스파르타인과 닮은 점이 많았다. 완고하고 실제적이며 규율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의 우아함과 섬세함에 대한 공경심으로 그리스의 모든 것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리스의 신들도 채택하였다. 제우스를 주피터로 바꾸고, 에로스를 쿠피도로 바꾸었다. 또 그리스 역사를 조금 차용하여 로마는 아이네이아스에 의하여 건국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트로이 함락 후 그리스 군으로부터 도망친 트로이의 왕자이다. 한편 역사가 윈우드 리드(W. Reade)는 초기 로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법자나 도망친 노예의 무리가 모여들어 도시를 만들고, 이것을 요새화 하여 모든 도망자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얻어맞아 반죽음 상태가 된 노예, 약탈한 물건을 짊어진 도둑, 손에 피가 묻은 살인자 등이 로마로 도망쳐 들어왔다. 도망쳐 들어온 땅은 곧 전투장으로 변하였다‥‥ 사람들은 전투와 농경을 번갈아 하였다. 옆에서 보기에 로마는 공포와 따돌림을 당한 땅이 되었다." 처음에 이 도시에는 여자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사비니족 여인들을 납치하였다. 이상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진진하다. 로마가 노예와 살인자에 의하여 건국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렴풋이나마 로마인의 정신구조에 있어서 결여된 부분을 설명해준다. 그 결여된 부분이란 감수성과 상상력이다. 로마인은 상상의 세계에 사는 것을 끝내 배우지 못하였다.
로마 역사는 세계 어느 도시의 역사보다도 범죄와 폭력에 넘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물질적 성향의 결과이다. 로마 역사를 평민과 귀족계급간의 초기의 투쟁으로부터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재위 475-476,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 역주) 치하에서의 몰락까지 모두 읽으면, 칼훈이 말한 '움직이는 하수구'의 전형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시인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Graves, 1895-1985)는 이것을 센세이셔널한 소설로 만든 최초의 문학가이다. 그의 소설 <나 클라우디우스>와 <하느님 클라우디우스>를 읽어보면, 살인·암살·음모·난교(亂交)·변태성욕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지옥의 파노라마 같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초대로부터 3대째의 로마 황제 - 역주) 치세에서의 생활은 알 카포네(1898-1947, 미국의 갱 두목 - 역주) 시대의 시카고 생활보다 더 위험하다는 인상이다. 소설가 특유의 선택이나 과장을 고려하더라도 이러한 인상을 부정하기 어렵다. 인간의 진화가 순수하게 물질적 단계에 한정될 때 어떻게 잘못될 수 있는가? 로마는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물질적 단계에서는 로마가 참으로 눈부신 업적을 이룩한 것도 사실이다. 로마의 공학기술은 스코틀랜드에서 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에 도로와 수로를 건설하였다. 로마 군대는 그리스 문명의 이상을 수백 평방 마일의 지역에 전파하였다. 그러나 자기 나라 로마에서는 무서운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스인은 선거라는 민주적 제도를 발명하였다.
한편 로마인은 선가라는 이름의 추잡한 살인제도를 후세에 전한 데 불과하다. 살인을 집요하게 해대는 정치구조이다. 많은 역사가는 기원전 133년의 호민관 티베리우스의 살해를 이것의 최초로 보고, 그후 약 1세기 후에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종지부를 찍었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공화제 초기에 이미 시작되었고, 5세기에 몰락하는 날까지 계속된다. 그 무렵에는 이 권력투쟁의 구조는 로마의 체질이 되고, 후세까지 간헐적으로 지속된다. 로마 교황의 역사는 바로 <나 클라우디우스>의 내용이 재현되는 감이 있다.
●갱의 룰
로마의 현실적인 역사는 에트루리아의 정복자가 최종적으로 축출된 시기로부터 시작된다. 기원전 509년경이다. 이 무렵 로마는 아테네와 같이 공화제였다. 아테네가 국운을 걸고 페르시아의 침입자와 싸우고 있을 무렵, 로마는 아주 독특한 개성을 발휘한다. 역사상 최초의 데모가 일어났다. 기원전 494년, 계급차별에 분노한 평민계급이 무리를 지어 로마에서 테베레강의 상류를 향해 행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권리가 인정되지 않으면 딴 도시를 건설하겠다." 노동력의 집단적 이탈을 겨냥한 데모는 효과를 발휘하였다. 귀족계급은 평민계급에 대표자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86년에 스푸리우스 카시우스라는 귀족이 평민계급에 공공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자고 제안하자. 귀족계급은 단결하여 일어섰다. 카시우스는 독재자 자리를 노렸다고 하여 탄핵을 받고 처형되었다. 다시 기원전 440년, 스푸리우스 마엘리우스라는 부유한 평민이 기근 때 민중의 지도자가 되고자 자기가 소유한 곡물의 가격을 내리는 사건이 있었다. 그는 급히 임명된 임시 독재관 앞에 호출되어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민중의 분위기를 달래기 위하여 그의 곡물을 무료로 분배하였다. 그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로마는 갱의 룰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실행단계에서는 적어도 조지 오웰(George Owell, 1903-1950)의 소설<1984>의 빅 브라더(국가의 독재)에 걸맞는 붉은 비단기 (훌륭한 명분)가 게양되었다. 마르크스 만리우스(Marcus Manlius)는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의 로마 점령시에 카피톨리누스 신전을 구출한 국민적 영웅이었다. 그는 전날의 용감했던 병사들이 빚 때문에 투옥되는 광경을 보고 마음 아파하며 사재를 들여 이 병사들을 해방시키려는 행동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귀족계급은 사회의 풍기를 문란케 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라 하여 이 이타주의를 백안시하고, 독재자의 지위를 노렸다는 이유로 만리우스를 탄핵하였다. 그리고는 대중을 선동하여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만리우스는 타르페이아의 낭떠러지에서 떠밀려 죽었다.
로마인에게 충격을 주고, 이제껏 없었던 단결을 촉구한 것은 갈리아인에 의한 점령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어쨌든, 로마는 그 뒤 수 세기인에 의한 점령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어쨌든, 로마는 그 뒤 수 세기에 걸쳐 확장을 계속한다. 만리우스가 처형되고 100년 남짓 경과하였을 무렵, 로마는 전 이탈리아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정복당한 사람들은 로마인의 지배를 받는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투표권을 가진 로마의 시민으로 편입되었다.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그들의 적으로서의 입장보다는 이 새로운 입장 쪽을 택하였다.
●바다의 역병신(疫病新) : 카르타고 용병
이 시점에서 지중해에서의 해적행위는 역사상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로써 로마인은 세계정복에 착수하게 되었다. 당시 지중해에서 로마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던 유일한 도시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현재는 튀니지 공화국의 일부 - 역주)이다. 카르타고는 처음에는 페니키아의 무역 중개지였다. 그것이 (현재의 홍콩처럼) 급속히 발전하여 여러 인종이 우글거리는 지역이 되었다.
지중해는 해적의 독무대는 아니었다.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그리스인, 마케도니아인, 리디아인, 시리아인, 에트루리아인, 로마인도 이곳을 무대로 삼았다. 따라서 카르타고는 해상세력으로서도 급속히 부상하였다. 얼마 동안 카르타고는 로마와 동맹하여, 그리스의 장군으로 에페시로스왕(재위 B. C. 282-297)의 피루스의 군대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피루스가 패배하고 본국으로 귀환하자, 두 나라는 시칠리아의 좁은 해협을 끼고 대립하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용병으로 싸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기원전 289년경 이 용병에는 마마틴이라는 이탈리아 종족이 섞여 있었다.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용병은 항시 위험한 존재였다.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에서의 전투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 용병군은 융숭하게 환영해준 메사나(현재의 메시나 - 역주)라는 그리스의 작은 도시가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한밤중에 그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 도시에서 남자의 목을 자르고 여자를 사로잡았다. 그들은 모험가였다. 농경이나 무역보다 해적의 길을 택하였다. 그때부터 25년간, 그들은 바다의 역병신으로 휩쓸고 다녔다. 주로 시라쿠사와 카르타고에서 출항하는 배를 먹이로 삼았다.
●로마와 카르타고 : 동맹, 그리고 교전
이탈리아 반도의 엄지발가락에 있는 레기움(현재의 레조 디 칼라브리아 - 역주)에서 다른 마마틴족의 군단이 이 용감한 이야기를 듣고 흉내를 내었다. 먼저 고용주를 몰살하고 도시를 제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의 주둔부대라고 생각되고 있었으므로 로마측은 이를 진압하는 군대를 파견하였다. 로마군은 도시를 포위하고 무법자 약 400명을 체포하여 대량처형을 단행하였다. 로마군은 시라쿠사의 히에로라는 이름의 그리스인 유력자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 히에로는 즉시 메사나에서 해적 소굴을 색출할 결의를 굳혔다.
카르타고측은 이 생각에 크게 찬성하고 원조군을 파견하였다. 놀란 것은 메사나의 해적이다. 뻔뻔스럽게도 로마에 사람을 보내어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운은 끝장이 나고 있었다. 로마의 원로원은 "해적을 돕다니 말도 안 된다. 레기움에서는 얼마 전 무법자를 처형하지 않았던가!" 하고 꺼려하였다. 그러나 평민계급은 여기서 약탈과 정복의 냄새를 맡고 원로원을 제압하였다.
독일의 고대사가 몸젠(Mommsen,1817-1903)이 지적하듯이 이것은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것이 로마 제국으로의 첫걸음이 된다. H. G. 웰스는 그의 저서<세계사 대계>의 제 5 권에서 다음과 같이 노기를 띠고 말하고 있다. "이리하여 가장 소모적이며 가장 파멸적인 일련의 전쟁. 인류의 역사를 암흑으로 몰고가는 전쟁의 막이 열리게 된다." 웰스는 이 결정이 로마 역사의 도덕적인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로마라는 이름을 퇴폐의 동의어로 만든 학살과 잔혹과 악과 배신 시대의 개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은 아닐까? 로마 전체가 '상식에서 벗어나' 악과 괴멸의 길로 치닫는, 빅토리아조 시대의 멜로드라마의 한 등장인물과 같은 느낌이다. 로마의 비극은 이것보다 훨씬더 복잡하였다. 로마인은 아주 현실적이며 사려 깊은 사람들이다. 평민계급과 귀족계급 사이의 타협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인의 섬세함과 지성은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는 달라서, 그러한 결여를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단순하고 사람 좋은 시골 출신 청년처럼 그들은 기질적으로 쾌활하고 직선적이었다.
제 1 차 포에니 전쟁(포에니는 페니키아라는 뜻)은 거의 25년간 계속되고, 로마는 궁지에 몰려 무릎을 꿇기 직전까지 이른다. 이것은 로마인에게 새로운 자질의 개척을 강요하였다. 무자비한 의지력, 열렬한 조국애, 특히 공격심이다. 국가는 개인과 비슷하다. 이러한 종류의 기질을 일단 몸에 지니면 국가도 개인도 이것에 집착한다.
이야기는 비약되지만 1935년에 <비열한 도시가 아니다>라는 주목 할만한 소설이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A. 맥아더(Mac Arthur)와 A. 킹즐리 롱(Kingsley Long)의 공저로, 두 저자가 잘 알고 있는 글래스고의 슬럼가가 무대이다. 제목은 성 바울로의 '나는 비열하지 않은 도시의 시민'에서 빌리고 있다. 소설은 조니 스타크라는 단순하고 아주 평범한 젊은이의 이야기이다.
이 젊은이는 자기를 지키기 위한 무술수련을 강요당한다. 그는 숙달하여 빛나는 성과를 거두어 '레이저 킹' (면도칼의 왕자 - 역주)으로 유명해진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성공은 그 자체가 함정이기도 하다. 일정한 배역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배우처럼 그는 자기 이미지에 이끌려, 타인에 대한 공격심과 폭력에의 취향에 말려든다. 마침내 그는 거리에서 활극과 같은 싸움으로 죽는다. 조니 스타크는 바로 로마 제국의 상징이었다.
●카르타고를 타도하자!
지중해의 레이저 킹을 향한 로마의 진군은 좌절로부터 시작된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힘은 팽팽하여, 전쟁은 오래 끌게 되었다. 24년이 경과하자 양쪽이 다 싫증이 났다. 먼저 카르타고가 평화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로마는 20만의 병사와 500척의 군함을 잃었다. 그로부터 20년하고 도 또 몇 년이 경과한다. 옛 라이벌이 다시 행동을 개시했다고 생각하고 경계를 강화하였다. 이윽고 양군은 다시 충동한다. 이것이 제 2 차 포에니 전쟁이다.
이번은 하밀카르의 아들 한니발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스페인에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본토로 침입하였다. 처음에는 가는 곳마다 전승을 올려 로마군은 도처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남부 이탈리아의 대부분의 도시들이 그에게 편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로마는 여기서 불독과 같은 끈기를 발휘한다. 장군 파비우스(오늘날의 페비언 협회 - 영국의 온건한 사회주의 단체 - 는 이 이름에서 연유한다)는 주력부대와의 격돌을 교묘히 피해가며 적의 전력소모를 기다렸다. 결국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북아프리카에 침공함에 따라 카르타고는 다시 화평을 요청하였다. 로마는 스페인을 병합하고 지중해 세계의 맹주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비극의 마지막 막은 그로부터 다시 반세기 후에 열리게 된다. 당시의 카르타고는 무해한 도시국가였다. 제국으로서의 영역은 전혀 없었다. 지난번 로마와의 평화협정으로 군대를 보유하는 것조차 금지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복당한 많은 민족과 마찬가지로 카르타고는 놀라운 끈기를 발휘하여, 전보다도 더한 번영을 실현하였다. 다시 로마에는 카르타고를 타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를테면 원로 정치가 카토가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마다 연설내용과는 관계없이 끝에 가서는 이렇게 외쳤다. "카르타고를 타도하자!"
그러나 문제는 명분이다. 현재의 카르타고는 분명히 해를 끼치지 않는다. 여기서 로마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구실을 잡는다. 카르타고의 이웃으로 로마의 동맹국인 누미디아(대략 지금의 알제리 - 역주)가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부득이 카르타고는 자위군을 조직하였다. 로마는 이것을 조약위반이라고 따지며 공갈 협박하였다. 카르타고는 개처럼 꼬리를 사리며 이에 복종하였다. 로마에는 트집거리가 없어졌다. 전쟁을 일으켜 살이 퉁퉁하게 찐 부를 마음껏 약탈하고 싶지만, 그 구실이 없다. 드디어 생트집을 잡고 늘어졌다. 현재의 영토를 포기하고 15킬로미터 안쪽으로 이동하라! 이렇게 하면 무역을 위해 바다에 의존하는 도시는 멀지 않아 소멸한다. 이 생트집은 주효하여 카르타고는 노기충천하였다. 마침내 로마는 선전포고로까지 몰고 갔다.
그러나 로마측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전 세대의 로마라면 카르타고 정복은 누운 소에 올라트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난번의 포에니 전쟁 이후, 국내사정은 매우 양상이 달라져 있었다. 부가 홍수처럼 흘러 들어왔다. 우유로 목욕을 한다는, 이제까지 들어본 적도 없는 사치가 유행하고 있었다.
정치의 부패도 심각한 상태였다. 평민계급 쪽도 정치가 측의 비위맞춤이나 오락의 제공으로 기골이 없어진 지 오래이다. 집정관 자리를 지망하는 사람은 수천 파운드가 드는 검투사 쇼를 개최해야만 한다. 쇼가 호화판일수록 선거에서 당선될 확률이 높다. 그전의 로마인은 일년에 한 번의 축제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수십 회이다. 지식계층은 그리스 문학을 배우고 플라톤을 논하며, 소년적 취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한편 돈 많은 젊은 멋쟁이들은 속이 거의 비치는 옷을 걸치고 헤어스타일을 경쟁하였다. 겨우 반세기 동안에 로마는 일종의 소돔으로 전락해 있었다.
●로마의 지중해 제패
이것은 무참한 결과로 나타난다. 최초의 카르타고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참패에 가깝다. 그것만이 아니다. 전염병이 번져 공격하는 로마군의 사기는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2년째에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로마군은 변두리 도시를 공격하며 어물쩍거리는 꼬락서니였다. 화가 치민 로마는 스키피오 - 전번 전쟁에서 무훈을 세운 같은 이름의 스키피오 장군의 손자 - 라는 청년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카르타고의 운명은 기울기 시작한다. 스키피오는 항구 외곽의 제방을 포위하여 도시로 물자가 유입되는 것을 저지하였다. 카르타고에는 아사의 위기가 닥쳐온다. 카르타고측은 로마인 포로를 성벽 위에 세워 놓고, 고문을 가하고는 로마군 진영에 떨어뜨렸다.
한편 카르타고에서는 음모가 끊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내부에서는 의견대립이 격화하였다.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한 사람의 시체가 시내에서 눈에 띄기 시작한다. 몰렉신(고대 셈족이 섬기던 불의 신 - 역주)에게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 이글거리는 화덕 속으로 내던진다. 액막이 의식이다.
적당한 시기를 보아 로마군은 총공격으로 나섰다. 성벽은 간단하게 무너졌고 난입한 로마군은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다. 방위군 측은 거리에서 거리로 서서히 밀렸다. 오래 버틸 힘이 없는 상태이다. 그래도 로마군이 중신부의 성채에 당도하기까지는 6일이나 걸렸다. 성채는 그 정상에 사원이 우뚝 솟아 있는 험준한 암벽으로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카르타고인도 항복하였다. 사원 안에는 로마의 도망병 900명이 있었다. 본국 군대의 동정은 기대할 수 없다. 로마군은 사원에 불을 지르고 도망병들을 불꽃 속에 던져 전멸시켰다. 포로는 노예로 팔렸다. 카르타고는 철저하게 불살라졌다.
원로원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한 개의 돌이라도 선 채로 지상에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도시가 잿더미로 화하자 땅을 가래질하여 다졌다. 뒤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는 카르타고를 재건하지만 같은 장소는 아니었다. 무수한 인간의 고통을 지켜본 땅은 저주받고 있었다 (이 경우의 저주는 문자 그대로이다. 로마의 성직자들은 이 땅을 저주하기 위하여 정성들인 의식을 거행하였다).
같은 기원전 146년, 로마는 그리스의 두 도시 사이의 분쟁에 개입하였다. 모두가 로마의 동맹국으로 간주되고 있는 도시국가였다. 이렇게 해서 코린트를 카르타고와 같은 운명으로 몰아넣었다. 땅에 가래질을 하고 그 장소에 저주의 기도를 올리고는 모든 시민을 노예로서 팔아치웠다. 그로부터 수 년 뒤에 서부 스페인의 루시타니아(포르투갈의 옛 이름 - 역주)가 로마의 주둔군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곳 도시 누만시아는 지도 위에서 지워졌고, 주민은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렸다. 이런 종류의 테러 행위는 불가피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로마는 힘과 규율의 부족을 폭력으로 보충하였다.
●스며드는 퇴폐
문제는 로마가 점점 비대해지는 데 있었다. 나태와 악이 서서히 다가왔다. 옛 시대의 일부계층은 그 위험성을 지적했지만 시민의 대다수는 그 지적이 의미하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였다. 로마는 이미 지중해 세계로부터 이탈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나라 마케도니아도 그분위기에 휩쓸렸다. 부근 도처에서 넘쳐흘렀다. 시민 모두에게 그 국물이 돌아갔으며 평민계급에도 전에 없던 큰 인심이 베푸어졌다. 이를테면 전쟁포로가 목숨을 걸고 사자나 호랑이와 격투하는 구경거리 등이다. 부유층들이 그들에게 오락을 계속 제공하는 한, 부유층의 권력이 증대해도 평민계급은 불평을 하지 않는다. 그 당시 로마와 같은 부유한 도시의 모든 개인에게는 넘칠 정도로 물자가 풍족하였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위대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또다른 손자)와 그의 아우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같은 인사들에게는 걱정이 있었다. 부와 땅의 대부분이 소수 인간들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것, 이 소수계층은 부패한 인종이라는 것이다. 로마의 위대함은 자기 땅을 소유하는 중소 자작농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그들이 두세 명의 노예를 소유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들은 노예들을 가족과 같이 대우했었다.
그러나 상황은 변하고 있다. 앞서 말한 마르쿠스 만리우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귀환한 병사는 빚 때문에 투옥되었다. 작은 농지는 부유한 지주에게 병합된다. 새로운 농장에는 지중해의 해적으로부터 노예가 보내진다. 이 노동력으로 생산되는 값싼 곡물이 시장에 나돈다. 나머지 소규모 농가는 시장에서 내쫓긴다. 농장에는 소처럼 낙인이 찍혀 사슬에 묶인 노예가 넘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들은 기회를 포착하여 탈출한다. 각지에서 도둑질이나 살인을 저지른 끝에 다시 잡혀서 고문을 받고는 죽음을 당한다. 기원전 134년 시칠리아 섬의 노예반란은 7만 명이 합세하여 그 섬을 제압하였다. 결국 로마는 이를 몰살하였다. 즐겁고 풍요로운 땅은 고민과 범죄의 땅으로 전락하였다.
시칠리아 섬의 노예반란이 있었던 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최초로 한 일은, 한 가족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를 제한하는 법안을 제출한 것이다. 그 밖에 집없는 병사들에게 토지를 제공할 것이라고 시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좀 지나친 일이었다. 원로원의 동료의원은 이에 반대하고, 노상에서 그를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또 한 사람의 '문제아'인 그의 아우 가이우스도 대충 같은 상황 아래서 살해되었다.
로마인은 자기 정당화의 과정으로서 모든 것을 폭력으로 몰고 간다. 국가나 개인이나 간에 이 고갯길을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하면, 브레이크를 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 사태를 인식하기에는 로마인은 너무도 상상력이 모자랐다. 한 마디로 근시안이었다. 비상사태라는 이유로 살인이 일단 정당화되면, 그것은 습관이 된다. 다음에는 병이 된다.
이 병을 로마에 만연시킨 장본인은 범죄자도 정신이상자도 아니다. 사실 그는 로마인의 미덕을 모두 갖춘 사람이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군대시절에 두각을 나타내어 귀족계급의 딸과 결혼한다. 호민관으로 선출되기까지 그는 계속 상승하여 마침내 민중의 대변인이 된다. 그가 40대 중반쯤 되었을 때 유구르타라는 아프리카의 한 장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유구르타의 게릴라 전법은 더없이 교묘하였다. 4년간에 걸쳐 계속 로마군을 괴롭혔다. 결국에는 마리우스 자신이 출정하였다. 그는 무력행사에서 모략으로 전환하였다. 유구르타의 장인이 뇌물을 받고는 자기편을 배반하고 로마군에게 붙었다. 이 장인은 '행운의 술라'라고 불리는 유능한 청년장교가 꾸며놓은 함정으로 유구르타를 유인하였다.
마리우스는 약속대로 사슬로 유구르타를 결박하여 로마로 데리고 돌아왔다. 성난 민중은 유구르타의 보석과 의복을 탈취하고, 귀고리도 비틀어 뽑았다. 귀가 찢겨질 정도로 끔찍한 짓이었다. 유구르타는 어름장 같은 지하감옥에 투옥되고 며칠 뒤에 처형되었다. 이로써 마리우스는 로마에서 인기 최고의 사나이가 되었고 승리의 트로피가 주어졌다.
원글보기
'제주큰동산 역사뜨락 > 서양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아메리카 인디언의 퉁소와 아리안 (0) | 2008.01.10 |
---|---|
[스크랩] 파국으로 치닫는 인류운명...막을 수 없는가! (0) | 2008.01.06 |
[스크랩] 핵무기 공격의 종류 (0) | 2007.11.20 |
[스크랩]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역사도시 베스트 10 (0) | 2007.11.08 |
[스크랩] 9.11때 공중에서 찍은사진 (0) | 2007.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