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영의 목호(일명 목자) 토벌
牧胡(또는 哈赤)란 원에서 제주도 목장에 파견하여 목마에 종사케 했던 몽고인 관리로 그들이 주로 마필 사육에 종사하였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元史》兵志 馬政條에 의하면 합적은 牧人으로 일명 哈刺赤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즉 哈刺赤은 黑馬乳의 譯言으로 궁중용의 마필을 관장하며 말젖을 짜서 빚는 목인의 직책(일종의 軍職)인 동시에 수 개의 장막이 일단이 되어 집단적으로 거주, 유목하고 있는 그들의 부락명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천호·백호 중에서 선발되어 부자가 대를 물려가며 그 직을 세습하였다.
원종 14년(1273)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 의하여 삼별초가 평정된 후 원은 제주도를 점거하여 목마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탐라 성주와 고려 조정에서는 점령의 부당성을 말하여 한 때 주권을 회복한 적도 있었으나 원의 정책에는 변함이 없어서 목호들은 원의 힘을 믿고 자주 난을 일으켰다.
목호의 난이 일어난 주요 원인은 중국에서의 元·明 교체기에 즉위한 공민왕의 배원 정책과 원에 빼았긴 옛 고려 영토의 수복 정책, 제주도의 잦은 귀속 문제, 제주도에서 길러진 마필의 진상 문제 등으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에서 제주도를 宣撫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들이 대게가 탐욕하고 포악하여 백성들이 이를 괴롭게 여겼기 때문에 목호들이 그들을 꾀어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목호의 난이 처음 일어난 것은 공민왕 5년(1356)이었다. 공민왕은 제주 목호들이 奇轍 일파와도 연루되었음을 알아내고 전 찬성사 尹時遇를 보내어 반란에 관계된 목호들을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목호들이 이에 불응하여 尹時遇와 목사 張天年, 판관 李陽吉을 살해하였다 (哈赤·忽古托의 亂). 또 공민왕 11년(1362)에도 고려 조정에서 온 만호 朴道孫을 때려 죽이고 바다에 던진 일도 있었다 (肖古禿不花·石迭里必思의 亂). 목호가 난을 일으킨 후 원에의 예속 내지는 원에서 관부를 설치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원인이 제주도 귀속 문제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제주도는 삼별초 정벌 직후 원에 예속된 이래 전후 약 100년간 때로는 원의 직할지가 되었다가 때로는 고려에 환부되는 등 그 귀속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호들은 그들의 직업에만 전념할 수 없는 불안한 상태였던 것이다. 때문에 고려는 반란의 소지를 없애기 위하여 무력 정벌을 꾀하기도 했으나 공민왕의 목호 토벌은 번번히 좌절되고 말았다.
공민왕 17년(1368) 원이 멸망하자 목호들의 사정은 완전히 고립상태가 되었다. 이 때 고려 조정에서는 먼저 명에 사신을 파견하여 제주도의 귀속 문제와 마필의 진헌 문제 등을 거론하였고 명도 우선은 고려의 교섭 조건을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제주의 주권을 회복하고 이 때부터 제주산 마필을 정기적으로 명나라에 진헌키로 하였다. 그리하여 공민왕 21년(1372) 고려에서는 마필을 징발하기 위하여 劉景元을 보냈는데 “목호들은 元帝의 명령이 없이는 적대국인 明에 말을 보낼 수 없다.”고 하여 유경원과 목사 겸 만호 李用臟 등을 죽이고 난을 일으켜 명의 첫 번째 마필 요구는 탐라 목호의 반발로 수포로 돌아갔다. 공민왕 23년(1374) 계속된 명의 마필 요구에 탐라 목호가 이에 응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자 결국 왕은 최영으로 하여금 목호 토벌을 명령하게 되었다.
최영의 목호 토벌군은 추자도를 거쳐 제주의 서해안 명월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리하여 싸움은 어름비(氷非:현 於音里), 밝음(明近)오름, 금물오름(今勿吾音:현 今岳里), 새별(曉岳)오름, 연래(延來=猊來), 洪爐(西歸)로 이어지며 계속되었고 최후로는 虎島(범섬)에서 목호들을 평정하였다. 이 사건은 실로 제주가 삼별초 항쟁이래 약 100년간 원의 굴레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자주성 회복의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 참고문헌
① 濟州道, 『濟州道誌』第一卷, 1993. ② 濟州道敎育硏究院, <최영장군 목호 토벌 전말>,『耽羅의 敎育遺産』, 1983. ③ 金奉玉, <원(元)의 지배 때 몽고인의 횡포>,『濟州道史硏究』3, 1994. ④ 高昌錫, <元·明交替期의 濟州道-牧胡亂을 중심으로->,『耽羅文化』4, 1985. ⑤ 高昌錫, <元代의 濟州道牧場>,『濟州史學』創刊號,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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