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유배지로서의 탐라
탐라는 우리 나라 역사상 유배지로서는 가장 適地性을 갖춘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배지로서 무엇보다도 강조되는 것은 隔離性에 있다. 王京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바다로 차단돼 있어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멀고 험한 곳이 가장 선호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遠惡地’ ‘遠惡島’가 바로 그것인데 탐라는 이러한 지역의 대명사로 불려졌다. 이러한 여건 때문에 탐라는 고려 후기 이래로 우리 나라의 대표적 유배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가. 유배의 시작
탐라에 처음으로 유배가 시작된 것은 14세기 초 원 제국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원종 14년(1273)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를 평정하였을 때 원 제국은 병력을 철수하지 않고 達魯花赤摠管府를 두고 탐라를 직속령으로 삼았다. 이로써 약 100년간의 원의 지배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때 元은 다른 나라의 왕족이나 권신 등 국내에 두기 곤란한 인물들을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1317년 魏王 阿木哥(武宗의 庶兄)를 시작으로 1322년에는 徽政院使 羅源, 1340년에는 索蘭奚大王을 유배시킨 것을 비롯하여 도적과 범죄인 등 모두 170여 명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이러한 流刑制度는 元이 멸망한 후에도 明에 의하여 답습되었다. 1382년 雲南을 정벌한 明 太祖는 伯伯太子와 그 아들 六十奴 등 梁王 一家를 비롯하여 1388년에는 귀순한 元의 達達親王 등 왕족 80여 호를, 1393년에는 梁王 자손 愛顔帖木兒 등 4명을 제주로 옮겨 유배시켰다.
나. 고려조의 유배인
우리 나라 사람을 처음으로 제주에 유배시키기 시작한 것은 1343년 忠惠王 때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원의 간섭을 받던 고려가 원의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앞서 고종 45년(1258)에 宋吉儒가 추자도에 유배된 적도 있으나 저명한 인물로는 승려 翯仙(충혜왕 4년,1343)을 시작으로 하여 趙得球·宗範(충목왕 때), 任君輔·金鏞·釋器(공민왕 때, 釋器는 제주도 수정사에 안치시키도록 하였으나 제주에 들어오지 않고 북변으로 달아남.) 등이 제주에 유배되고 있다.
그러나 고려 때의 유배인은 많은 사람이 온 것은 아니었으며 또 기간도 비교적 짧은 편이었다. 제주도가 우리 나라의 대표적 유배지로 등장한 것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 특히 사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연산군 이후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 여말 선초의 流亡人과 流配人
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1392)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 건국에 불복하여 도피해온 流亡人과 유배인들이 제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들 망명객과 유배인들의 제주에 들어온 후의 훈학과 교화 활동에 힘입어 제주도의 교육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는데 《濟州道志》에 의하면 그 대표적 인물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단 여기에는 비록 조선 시대에 유배되었던 인물이라 할지라도 고려의 유신으로서 조선 건국 당시 이에 저항하다가 유망하였거나 유배된 인물의 경우는 함께 수록하였다.
∙ 진계백(秦季伯) : 李穡의 문인으로 공민왕 때 찬성사를 역임하였는데 辛旽을 축출한 후에도 권신 간에 알력이 심하므로 관직을 사임하고 제주도에 들어와 애월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2년 후인 공민왕 23년(1374) 7월에 목호의 난이 일어나 8월에 崔瑩이 이를 토벌하였다. 이 때 최영이 진계백이 戚族이므로 귀경을 권하였으나 국정의 혼란과 불의가 만연함을 한탄하면서 그대로 남으니 이가 제주의 秦氏 入島祖이다.
∙ 김윤조(金胤祖) : 삼별초의 내침을 막기 위하여 제주에 들어온 영암부사 金須의 증손이다. 그의 형 金興祖는 공민왕 17년(1368) 辛旽이 집권하여 국정을 어지럽히자 이를 제거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김윤조는 제주도에 들어와 김녕리에 은거하니 이가 光山金氏의 入島祖이다.
∙ 한 천(韓 蕆) : 공양왕 3년(1391) 판개성부사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나 동왕 4년(1392) 임신 7월 공양왕이 원주로 축출되자 왕의 사위 禹成範, 姜淮季 등과 李太祖 제거를 모의하다가 탄로되어 禹成範과 姜淮季는 참형되고 한천은 제주도에 유배되어 정의현 가시리에 은거하면서 부근 자제들을 훈학하였으니 그가 제주 淸州韓氏의 入島祖이다. 고종 10년(1873) 유배온 崔益鉉은 그 유허지를 돌아보고 遺墟碑銘을 남겼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탐라의 땅 가시리에···(중략)···公은 여말에 태어나 학행이 뛰어난 절의의 인물로서 國事를 볼 때에는 문교를 폈고, 나라의 죄인이 되어서도 백성에게 인륜을 심어주어 오늘에 이르렀다. 《高麗史》에 의하면 공민왕 20년 신해 2월에 경상도 도순문사로 삼았고, 공양왕 3년 신미에는 판개성부사를 배하였는데 4년 임신 7월 공양왕이 원주에 방치되자 단양군 우성범, 진원군 강회계는 참하고 대제학 한천은 탐라에 유배된 것이 실록이니 백세에 징표함이 족하다.···(중략)···오호라 周의 臣僕이 되지 아니한 箕子는 동으로 와서 八條之敎를 베풀어 우리 나라를 문명되게 하였는데 二姓을 섬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하여 공은 남으로 건너와 향약을 세우고 선비를 가르치니 이 섬에 점점 학문이 일어났다.···(중략)···나 益鉉이 이곳을 지나다가 남모르게 감격한 바가 있어 이 글을 적어 遺墟碑銘으로 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 변세청(邊世淸) : 고려말 중랑장이었는데 그의 조부 邊安烈은 공민왕 23년(1374) 제주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자 최영과 함께 와서 난을 진압하였다. 그 후 왜구가 단양군까지 침입하였을 때 이를 안동에서 격멸하였으므로 그 공으로 原州府院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문하찬성사에 오르고 공양왕 초에 領三司事에 임명되었다. 이 때 金佇가 郭忠輔와 이성계 제거를 모의하였는데 곽충보가 이를 밀고하여 김저는 참형되고 변안렬도 연루되어 한양으로 유배하였다가 죽었다. 이 때 변세청은 제주로 들어오니 이가 原州邊氏의 入島祖이다.
∙ 허 손 (許 遜) : 대제학 許欽의 아들이다. 그 형 홍암군 許懲은 충정왕의 부마이다. 허손은 여말 밀직제학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형 허징은 1392년 고려가 멸망할 때의 杜門洞 節臣 72賢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이 있다. 부친 허흠이 망국의 슬픔을 안고 자결하자 허손도 절의를 지켜 제주에 들어와 종달리에 은거하면서 지방 자제들을 훈학하였는데 이 사람이 陽川許氏의 入島祖이다.
∙ 김인충(金仁忠) : 고려말 강화진좌령낭장으로 있었는데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사임하고 제주에 들어오니 羅州金氏의 入島祖이다. 후손에는 良將과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 김만희(金萬希) : 공민왕 때 左獻納의 벼슬에 있었는데 신돈이 조정에 들어오자 李存吾가 배척상소를 올릴 때 함께 諫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후 신돈이 제거되자 복직되어 찬성사를 역임하고 좌정승을 배하였으나 신병으로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1392년 조선 건국시 不事二君이라 하여 불복하다가 정몽주당이라 하여 태조 2년(1393) 10월에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는 애월포에 상륙하여 그 곳에 은거하였다. 그가 남긴 《襄海原辭錄》에서 말하기를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改名하였으니 그 죄가 萬萬하여 밝은 사리를 거울삼아 希天할 따름이다”라 하여 이름을 萬希로 고쳤다. 이가 金海金氏의 入島祖이다.
∙ 이 미(李 美) : 고려말 校里로 있다가 나라가 망하자 사직하고 은거하였다. 태종이 등극하여 그를 소환하였으나 불복하여 끝내 出仕하지 않았으므로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는 외도에 은거하면서 지방 자제들을 훈학하였는데, 1420년(세종 2년) 5월 그의 형 李伸이 이곳 수령으로 부임하여 동생을 찾고 간곡히 출륙을 종용하였으나 “바다섬이 비록 더럽다고 말하지만 이곳도 나라의 영토가 아닐 수 없네. 이 마음 속에는 옛 님을 우러러 볼지언정 두 마음 가진 사람이 되기를 즐기랴”하였다. 이가 慶州李氏의 入島祖이다. 형은 끝내 동생이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자 그 해 11월 사임하고 떠났다. 이들 유망민 내지는 유배인들은 긴 유배 기간 동안에 독서나 詩作 활동 등 자신의 시간으로 보내기도 하였지만 적지 않은 시간을 도민이나 그 자제를 가르치는데 투자했다. 유배인들은 거의 그 시대를 대표할만한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도민들은 유배인들이 오면 앞다투어 교유하고 자녀 교육을 부탁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도민들은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지식을 깨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조선 초기의 향교의 설치와 함께 본격적인 교육 활동이 행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 참고문헌
① 濟州道, 『濟州道誌』第1卷, 1993. ② 洪淳晩, <朝鮮時代 濟州 流配人들의 도래와 그 影響>, 『第9回 國史編纂委員會 史料調査委員會議-濟州道- 發表要旨』, 國史編纂委員會, 1994. ③ 朴用厚 , 『濟州道誌 , 1976 . ④ 高昌錫, <朝鮮朝의 流刑制度와 濟州道>, 『耽羅文化』第5號(金宗業敎授停年退任 記念號), 1986. ⑤ 濟州道, 『濟州道誌』第三卷, 1993. ⑥ 康錫奎 , <耽羅-近代의 濟州鄕土敎育 >,『康錫奎停年退任 記念論文』, 全南大學校 出版部 ,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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