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들이 우리 역사의 전성기라 찬양하는 고구려. 고구려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이후 역사가 고구려를 계승하지 못했음을 많은 이들이 한탄한다. 그리고 비교한다. 조선과. 문약했던, 그래서 외세에 의해 멸망해야 했던 조선의 대안으로서 더욱 고구려를 찾고 고구려를 찬미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과연 고구려가 조선의 대안일 수 있는지.
조선은 500년 동안 무려 4차례의 외침을 당했다. 두 번은 일본에게서, 두 번은 만주족에게서. 그리고 그 가운데 두 번은 결정적인 패배로 인해 자존을 잃고, 국권을 잃었다. 침략자에 비해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임진, 정유 양년에는 일본에 비해 군사력이 약했고, 정묘, 병자 두 호란 때는 청에 비해 군사력이 약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의 길을 걷던 일본에 비해 총체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들어 사람들은 조선의 나약함을 비판한다.
하지만 그 대단하다는 고구려 또한 700년, 혹은 900년 동안 10여차례 이상의 치명적인 외침을 겪었다. 동천왕 때는 조위曺魏의 장수 관구검에게 패해 왕검성이 불타고, 백제와의 싸움에서 국왕인 고국원왕이 죽기도 한다. 북연은 고구려의 왕검성을 침략해 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가져갔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10여차례에 걸친 침입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수십년에 걸친 수와 당의 침략은 고구려로 하여금 축차적인 전력의 손실을 강요하여 백제 멸망 이후에는 아예 요동과 패수 이남을 당과 신라에 내주고 허무하게 멸망하기에 이른다.
기록에 없어 당시 고구려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가는 나오지 않는다. 관구검의 침입 때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었으며, 북연은 또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을 납치해갔는지도 나오지 않는다. 수당의 침입에 대해서는 두루뭉수리하게 여러차례의 전쟁으로 요동방어선이 약화되었다는 식으로 나올 뿐이다. 하지만 요동성이 함락되고, 오골성, 신성, 비사성 등의 여러 성들이 당군의 수중에 떨어질 정도라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외침만이 아니다. 외세나 끌어들이는 비겁하고 나약한 나라라는 신라는 진흥왕 때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래 한 번도 한강 유역을 백제나 고구려에 내준 적이 없다. 고구려가 전력을 기울여 신라를 공격했음에도 신라는 당과 교통할 수 있는 한강유역을 굳건히 지켜 이후 당과의 외교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기반으로 삼았다. 그 대단한 군사강국 고구려가 영토에서 절반도 안 되는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를 끝내 빼앗지 못하고 스스로가 멸망하는 화근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북연을 크게 패퇴시켰다고는 하지만 후연은 당시 중국에 있던 어려 나라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고구려의 전성기에조차 북연을 크게 패퇴시켰을 뿐, 후연을 완전히 멸망시켜 아우를 힘을 갖추지 못했다. 이후로는 아예 중국을 공격해서 영토를 넓히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고구려의 상무정신을 상징하는 수, 당과의 항쟁 또한 수와 당이 중국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침략했던 방어전쟁 아니던가. 그 와중에 남쪽의 신라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해 결국은 멸망에 이르렀던 것이고.
고구려의 강성함이란 고구려 전성기의 백 여 년 정도의 강성함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 전성기 이전의 고구려는 살아남기 위해 때로 중국에 사대하고, 중국 조정의 관직을 제수받기도 하던 변방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전성기 이후로는 인구는 적고 땅만 넓은 나라를 유지하느라 서쪽과 남쪽의 국경선에서 숱한 싸움을 치르며 국력을 허비하다가 끝내는 자신보다 몇 배 크고 인구도 몇 배 많은 당나라에 멸망하고 말았고.
하긴 그것은 고구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고, 가장 거대했던 제국 몽골도 고작 100년도 흐르기 전에 이리저리 찢겨 흩어지더니, 그들의 칸인 원나라 황제가 중국에서 쫓겨나 북원으로 도망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고작 십만의 병력으로 중국을 집어삼켰던 청나라는 서양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맥없이 멸망하고 말았고.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유럽의 대프랑스연합에 무릎을 꿇었고, 독일제국은 1차세계대전의 끝에 굴욕적인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역사상 500년이라는 기간 동안 4번 정도의 치명적인 침략을 당해야 했던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4번이라는 횟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적어서 많지 않다. 바다로 둘러싸여 외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섬나라 정도가 아니라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 이상의 침략의 역사를 갖고 있다. 심심하면 유럽의 역사를 뒤져보기 바란다. 지금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나라들의 지난 500년의 역사를 본다면 꽤나 피터지는, 그래서 많은 것을 잃어야 했던 역사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화네 어쩌네 잘난 체 하는 중국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조선은 매우 비정상적인 나라였다. 나약해서가 아니라 주변에 많은 적을 두고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특별한 나라였다. 최소한 침입을 당한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남들보다 더 많이 침략당했던 무능하고 나약하기만 한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다.
원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전성기와 쇠퇴기가 있다. 아니 전성기가 있기에 쇠퇴기가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국경이 넓어지고, 군사가 강해지고, 권력이 공고해지면 나라는 당연히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국경과 군사와 권력은 끊임없이 그 나라의 자원을 소비하는 것이기에 결국 그 강성함으로 인해 나라는 끊임없이 쇠퇴하게 된다. 역사상의 여러 제국들이 멸망한 과정이 그러했고, 거기에는 예외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미국을 보라. 세계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현실이 어떠한가를.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이 보이는가? 미국의 감히 견줄 수 없는 정치외교력이 보이는가? 하지만 많은 이들은 알고 있다. 그 군사력과 정치외교력 이면에 점차 약체화되어가는 몸만 비대해진 늙은 곰 미국의 모습을. 중산층이 붕괴되고, 미국을 지탱하던 민주주의적인 가치마저 쇠퇴해 가면서, 이전의 멸망한 제국들의 뒤를 밟아가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미국의 푸들 노릇이나 열심히 하고 있는 영국이 한 세기 전 세계최강대국이었음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구한말 쇠퇴기가 있었듯 조선에도 당연히 전성기는 있었다. 물론 군사력에서도 주위의 나라를 압도하던 전성기였다. 2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요동까지 정벌하겠다고 살벌하게 군대를 훈련시키던 시기가 조선에도 있었다. 설마 여진의 추장들이 벼슬자리 하나 얻자고 조선에 귀순했겠는가? 일본이 평화를 사랑해서 사신을 보내 제발 무역 좀 하자고 사정을 했겠는가? 4군과 6진을 개척하면서 여진과의 싸움이 없었다고 생각하는가? 왜관을 열어 통교를 시작한 이후 왜구가 줄어든 것이 왜구들이 개과천선해서 무역상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라 생각하는가?
조선 전기와 중기의 평화와 안정은 조선의 사대교린외교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조선이 당당히 사대교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여진을 야인이라 얕잡아보고, 일본을 왜인이라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억누를 수 있었던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힘이 있었기에 여진은 두만강을 함부로 넘어오지 못했고, 일본은 조선의 남해안을 침입하지 못했다. 작은 충돌이나 작은 약탈이야 있었을 지 모르지만 그것은 국지적인 사건에 불과했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까지 200년간의 평화가 여진과 일본이 평화를 사랑해서 문약한 조선을 봐주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전성기의 강성함으로 숭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면 조선 또한 조선 전기의 강성함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아야 한다. 쇠퇴기의 약세를 이유로 문약함을 비판받아야 한다면 고구려 또한 신라 하나 마음대로 못했던 그 나약함을 비판받아야 한다. 아니 군사적인 패망에 대해 나약함에 책임을 둔다면 세계 어느 나라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얼마전 토론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려니 한 일본인이 이런 말을 한다. 조선의 양반과 일본의 사무라이를 비교해 봐야 하지 않느냐고. 아마도 일본 사무라이들이 보다 더 진취적이고 개방적이고 실용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정작 에도막부 이후의 일본 사무라이를 보면 조선의 양반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말이 사무라이지 칼을 휘두르는 법도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었고, 무사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추신구라의 무사들조차 할복하는 법을 몰라 따로 교육을 받고 할복을 해야 했다. 이 시기 사무라이에게 중요한 것은 더이상 검술이 아니었다. 도나 예라 불리우는 교양이었다. 무사도란 에도막부 이전과 개항 이후에 아주 잠깐 존재했던 일종의 역사적 환상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의 사무라이와 비교하여 조선의 양반을 문약했다 비판한다. 우습지 않은가?
조선 중기까지 조선의 사대부들은 무를 겸비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실제 4군과 6진을 개척한 최윤덕과 김종서는 문신이었다. 28살에 요절한 장군 남이도 무신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도 다수의 사대부들이 칼을 들고 활을 들어 의병을 이끌고 일본과의 싸움의 선두에 나섰다.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 조헌, 김덕령이 설마 초야에서 무술을 닦던 무인이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사대부였다. 선비. 과연 그들이 유학을 신봉한다 해서, 그리고 문치를 중시한다고 해서 문약했다 할 수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조선의 문약에 대한 비판은 터무니없는 오해에서 비롯한 과잉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조선은 중국에 비해 약했다. 그래서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사대를 했다. 몇 차례의 외침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은 그 몇 차례의 침략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기간에 걸쳐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만큼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적었다. 조선이 노론의 독주에 이은 세도정치로 결정적으로 쇠퇴하기 전까지 군사적 외교적으로 주위 여러 나라와 민족들에 대한 소중화라는 말에 걸맞는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조선이 침략당한 역사만을 보지 말고, 조선이 침략당하지 않던 그 외의 역사를 보라. 조선이 외세에 굴복하던 것만을 보지 말고, 주위 여러 나라와 민족이 조선의 우위를 인정했던 역사를 같이 본다면 조선이 문약했다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해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그저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었을 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주위에 적이 많았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500년을 이어 유지되었다. 어찌 그것을 나약하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잘못된 편견으로 인한 부당한 오해라 아니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