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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궁궐 옛보기38 궁궐의 꽃 궁녀, 시녀와 동침한 세종대왕 며느리 |

제주큰동산 2008. 2. 1. 15:58

세종대왕 며느리는 레즈비언

사료에서 발견되는 가장 충격적인 레즈비언은 세종대왕의 며느리이자 문종의 두 번째 부인인 봉씨. ‘세종실록’에 따르면 당시 궁내에는 시녀들간에 동침하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궁녀의 성과 사랑

조선 시대 현직 궁녀들의 간통은 참형으로 처벌되었다. 이러니 죽을 작정이 아니라면 감히 궁녀들이 남자와 간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궁녀에게 성욕 자체가 없을 수는 없었다. 남자와의 성이 금지된 젊은 궁녀들은 함께 사는 하녀나 친구들과 동성애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를 보통 대식이라고 했는데, 대식은 은밀하게 행해지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이렇듯 은밀하게 행해지던 궁녀들의 동성애가 겉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 세종 때 있었다. 세종의 큰며느리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를 벌이다 적발되어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봉씨는 세종의 두 번째 큰며느리였다. 문종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김씨는 학문에만 열중할 뿐 자신을 모른 체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압승술을 행하다가 시아버지 세종에게 적발되었다. 그러나 김씨가 쫓겨난 후 들어온 봉씨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봉씨의 동성애 상대자는 자신의 지밀에 있던 소쌍이라는 궁녀였다. 봉씨는 소쌍을 육체적 동성애 상대로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사랑했던 듯하다. 거의 매일 밤 독수공방하는 봉씨는 늘 소쌍을 데리고 잤다.

봉씨가 소쌍과 잔 날에는 이불과 베개를 직접 거두고 다른 궁녀들은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이불과 베개를 몰래 빨기도 했다. 당연히 세자빈이 궁녀와 동성애에 빠졌다는 소문이 궁중에 파다하게 퍼졌고, 이런 소문은 돌고 돌아 세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봉씨는 내쫓기고 말았다
.

궁녀와 내시 간의 사랑도 있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을 궁궐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서로 정이 들었을 것이다. 세종 때의 궁녀 내은이와 내시 손생이 그런 관계였다. 둘은 정이 깊어지자 미래를 언약하기도 했다.

그 징표로 내은이는 세종이 쓰던 청옥관자(靑玉貫子)를 손생에게 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이것이 전부였지만, 이 사실이 적발되자 세종은 두 사람을 참형으로 다스렸다.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한 세종이었지만 궁녀들의 성 문제에 대해서는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이렇듯 엄격한 기강으로 조선 시대 궁녀들의 성은 금지되었다.


조선의 신데렐라, 신빈 김씨

조선 시대의 많은 왕 중에서도 최고는 단연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조선 시대만 대표하는 위인이 아니라 한국사 5,000년을 대표하는 최고의 위인이기도 하다.


이런 세종대왕을 둘러싼 ‘조선판 신데렐라’ 이야기가 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신빈 김씨이다. 공노비였던 신빈 김씨는 젊은 세종의 즉위를 계기로 궁녀로 입궁하였다. 즉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궁녀 충원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그렇다고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모시던 궁녀들을 세종과 왕비의 궁녀로 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많은 궁녀들을 들이기로 했는데 내자시 여종이었던 신빈 김씨도 이때 궁궐에 들어왔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소헌왕후의 지밀 나인이었던 신빈 김씨와 사랑에 빠졌다. 세종 9년부터 12년 동안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는 여덟 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그녀는 조선 시대의 후궁 중에서 두 번째로 아들을 많이 낳았다.  << 임금은 무치요 ~~~ >>

이 이야기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세종과 신빈 김씨의 결말이 해피 엔딩이라는 사실이다. 후궁의 만년이 해피 엔딩이 되려면 왕의 사랑뿐만 아니라 왕비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세종과 왕후 심씨, 신빈 김씨는 놀라울 정도로 의가 좋았다. 이는 세종 16년 소헌왕후가 막내아들 영응대군을 낳았는데 영응대군의 양육을 다른 사람이 아닌 신빈 김씨에게 맡긴 예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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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 춘화도 작품 12.


중국의 조선 출신 궁녀, 청주 한씨

조선 시대의 공녀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산 경우는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 때 들어간 청주 한씨였다. 조선이 명나라에 공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태종 때부터이다. 이후 세종 때까지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공녀를 보냈는데 한씨는 3차 때 보내졌다.

영락제는 한씨의 인품과 미모 모두에 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으로 칙사를 보낼 때마다 한씨의 친정집에 각종 선물을 보내곤 할 정도였다. 심지어 한씨의 오빠 한확을 사위로 삼아 옆에 두려고까지 했다.

비록 한확의 거절로 성사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런 후광 덕분에 한확은 조선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훗날 한확은 수양대군을 도운 정난 공신으로서 당대를 주름잡는 거물이 되었다. 그러나 한씨의 행복은 잠깐이었다.

명나라에 간 지 7년 만에 한씨를 사랑하던 영락제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한씨는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에 영락제를 따라 순장을 당하고 말았다.




궁녀 Q & A

▷ 마지막 궁녀 성옥염 상궁

성옥염 상궁은 열다섯 살 때 창덕궁 침방(針房) 나인으로 입궁하여, 마지막 왕비 윤비를 1966년 작고할 때까지 모셨다. 윤비의 3년 상을 치른 후에는 보문사에 들어가 궁녀로서의 절개를 지켰다. 2001년 5월 4일 여든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지갑에 들어 있던 23,000원이 유품의 전부였다고 한다. 유언은 “저 세상에 가서도 모실 수 있도록 윤비의 위패를 모신 백운사에서 49재를 지내 달라.”였다.

▷ 방굿례
왕이나 왕비 등을 모시는 궁녀는 생리적인 방귀도 마음대로 뀔 수 없었다. 만약 선배 궁녀 앞에서 방귀를 뀌는 실수를 하면 벌을 받았는데, 벌로 집에서 떡 벌어지게 음식을 차려 와 대접하는 방굿례를 해야 했다. 방굿례를 하면서 궁녀는 자신의 실수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했을 뿐만 아니라 음식 장만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 범죄를 저지른 궁녀의 처벌
궁녀가 죄를 지으면 어디에서 조사했을까? 형조도 아니고 의금부도 아니었다. 의아스럽겠지만 내수사에서 환관들이 조사, 처벌했다. 왜냐하면 형조나 의금부에서 궁녀를 조사하면 조정신료들의 귀에 궁중 안의 내밀한 사정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녀를 처벌할 일이 있으면 내수사의 감옥에 가두고 환관들이 조사했다. 물론 조사 내용은 환관이 왕에게만 보고하여 신료들은 알지 못하도록 했다.

▷ 신참 궁녀들의 ‘쥐 부리 글려’
그해에 입궁한 어린 궁녀들에게는 밀떡을 물린 다음 그 위에 수건을 접어 양쪽에 삼실로 끈을 달아서 마스크같이 귀에 걸게 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면 대궐 뜰에 길게 한 줄로 세워 두었다. 그러면 수십 명의 젊은 내시들이 긴 바지랑대 끝에 횃불을 붙이고 궁녀들에게 다가와 입을 지지는 시늉을 하면서 “쥐 부리 글려. 쥐 부리 지져.”라고 위협했다. 그러면 어린 궁녀들은 겁에 질려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는데, 이것을 먼발치에서 왕비 이하 궁녀들이 구경했다고 한다.

이는 새로 입궁한 어린 궁녀들에게 말조심을 일깨우기 위한 행사이며 동시에 궁녀들 사이에 숨어들었을지도 모르는 잡귀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주술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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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지은이 : 신명호 >
1965년 강원도에서 출생했다. 조선시대사 전공인 그는 특히 군주제와 왕실 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한중일 삼국의 군주제와 왕실 문화를 본격적으로 비교 연구하는 데 주력하고자 한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선임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를 거쳐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조선의 왕』(1998),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 문화』(2002), 『조선의 공신들』(2003) 등이 있다.



출처 : 궁궐 옛보기38 궁궐의 꽃 궁녀, 시녀와 동침한 세종대왕 며느리 |
글쓴이 : 물망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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