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긍의 고려도경에 나타난 고려의 위치
道不遠人칼럼
12c 중엽 고려을 방문한 북송의 서긍은 고려에 약 4년동안 머물면서 고려의 위치,관제,복식,풍습에 대하여 책을 집필하였는데 그것이 高麗圖經 입니다. 특히 당시 고려의 위치를 판단해 보면 우리가 그동안 교과서에서 본 평안도,함경도를 국경으로한 반도유역의 고려가 아닌 대륙 고려로 판단되며 그 이유로는 아래글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와 맞닿았고 북쪽은 옛 글안 땅과 연속되고 동쪽은 금(金) 나라와 맞닿았다. 또한 일본․유구․탐라․흑수(黑水)․모인(毛人) 등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 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合倂)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라고 한 부분이며 고려의 남쪽이 요해라 함은 지금의 발해만이 아닌가 합니다.특히 수도를 언급한 부분에서는 개주부가 위치한 開州(카이조우 -현 중국의 하남성부근 ?)를 수도라하였고 서로는 거란(현재의 중국의 감숙성 및 녕하성 윗쪽)과 국경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여튼 고려는 반도가 아닌 대륙에 위치 하였다는 사실이 확실한것으로 추정 됩니다. 해석을 식민사관에 의해 할 경우에는 반도에 위치할수도 있다고 해석이 될수 있습니다만 ,그 위치는 이미 宋史에서도 재 확인 되는 일이라서 우리의 역사안목을 시급히 교정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하겠고 필요하신분을 위해 고려도경 번역본을 업로드 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고려의 강역을 가늠할수 있는 서긍의 고려도경 초반부 해석본 입니다.
---------------------------------------- 고려도경 ------------------------------------------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와 맞닿았고 북쪽은 옛 글안 땅과 연속되고 동쪽은 금(金) 나라와 맞닿았다. 또한 일본․유구․탐라․흑수(黑水)․모인(毛人) 등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 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合倂)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로부터 육로(陸路)로 가다가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천 7백 90리이다. 만약 바닷길로라면, 하북(河北)․경동(京東)․회남(희南)․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에서는 모두 갈 수 있는데, 지금 세워진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내주(내州)․빈주(濱州)․체주(체州)와 서로 바라다보인다. 원풍(元豊) 이후부터 매양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려면, 언제나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출항(出航)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북으로 간다. 배 운행은 모두 하지(夏至)뒤에 남풍(南風)의 바람 편을 이용하는데, 5일이 못되어 곧 해안(海岸)에 닿는다. 옛적에는 봉경(封境)이 동서는 2천여 리, 남북은 1천 5백여 리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합병하여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지만 그 서북쪽은 글안(契丹)과 연속되었다. 옛적에는 대요(大遼)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의 침벌을 받게 되매,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압록강을 믿고 요새로 한 것이다. 압록강의 물 근원은 말갈(靺鞨)에서 나오는데, 그 물 빛깔이 오리의 머리빛깔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遼東)에서 5백 리쯤 흘러가다 국내성(國內城)을 지나서 또 서쪽으로 흘러 한 강물과 합류하니,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는 이 강물이 가장 크다. 물결이 맑고 투명하여 지나는 나루터마다 모두 큰 배가 정박해 있는데, 그 나라에서 이를 천참(天塹)으로 여긴다. 강물의 너비가 3백 보(步)인데, 평양성(平壤城)에서 서북으로 4백 50리이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으로 4백 80리에 있다. 요수에서 동쪽은 옛날 글안에 소속되었었는데, 지금은 그 오랑케 민중이 이미 멸망되었고, 금(金) 나라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不毛地)이기 때문에 다시 성을 쌓아 지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갓 왕래하는 길이 되었을 뿐이다.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황암(黃암)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이다. 당(唐) 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이 적(李勣)이 남소(南蘇)에서 고려를 크게 깨뜨리고, 강을 건너가신 그 강물이 매우 얕고 좁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것이 요수(遼水)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로써 전고(前古)에는 일찌기 이 강을 믿어 요새로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이래서 고려가 물러들어가 압록강의 동쪽을 확보한 것이 아니겠는가?
형 세 形勢
고려는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陰陽說)에 구애되어 꺼리기 때문에, 그들이 나라를 세움에는 반드시 그 형세를 관찰하여 장구한 계책을 할 수 있는 곳인 연후에 자리잡는다. 한(漢) 나라 말엽(末葉)부터는 환도산(丸都山) 아래로 옮겼고, 후위(後魏)부터 당 나라 때까지는 모두 평양(平壤)에 있다가, 이 적(李勣)이 그 곳을 평정하고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함에 이르러서는, 도망하여 점점 동쪽으로 가서 살았기 때문에 그 곳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당 나라 말엽에 나라를 복구한 데가 곧 지금 도읍한 곳에 해당되는데, 대개 전에 개주(開州)이던 곳으로, 지금도 오히려 개성부(開城府)가 설치되어 있다. 그 성(城)은 북쪽으로 숭산(崧山)에 의지했는데, 그 형세가 건해방(乾亥方)에서 뻗어내려오다가 산 등성이에 이르러서는 점차 나뉘어 두 줄기가 되어 다시 서로 감고 돌았으니, 음양가들이 말하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줄기이다. 오음(五音)으로 논한다면, 왕씨(王氏)는 상(商)에 해당하는 성이니, 서편이 높게 보이면 흥하는데, 건(乾)은 서북에 해당하는 괘(卦)이다. 뻗어내린 등성이가 해방(亥方)으로 나갔는데, 그 오른쪽에서 산 하나가 꺾어져서 서쪽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정남(正南)으로 돌아나와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형상이 동이를 엎어놓은 것 같고, 따라서 안산(案山)이 되었다. 그 밖에 또 안산 하나가 있어 그 높이가 배나 되는데, 좌향(坐向)이 서로 호응하여 객산(客山)은 남방(丙)에 있고 주산(主山)은 북방(壬)에 있다. 물은 숭산(崧山) 뒤에서 발원(發源)하여 북쪽으로 곧게 북쪽(子位)으로 흐르다가 돌아서 동북쪽(랑)에 이르러 꾸불꾸불하게 성으로 들어와 광화문(廣化門)에서 조금 꺾어져 북으로 향하다가 다시 남쪽(丙地)으로 흘러나간다. 이상은 대개 건괘(乾卦)는 금(金)이 되고 금의 장생방(長生方)은 동남쪽(巳方)에 있는 것이니, 이는 길한 자리가 되는 것이다. 숭산 중턱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면, 왼쪽에는 시내, 오른쪽에는 산, 뒤는 등성이, 앞에는 고개인데, 숲이 무성하여 형세가 ‘시냇물을 마시는 푸른 용’과 같으니, 그 자리가 동토(東土)에서 역년(歷年)을 오래도록 보유하면서, 항시 성조(송나라)의 속국이 됨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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