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 -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와 용서를 비는 황제 '하인리히 4세'
하인리히 4세 [Heinrich IV, 1050.11.11~1106.8.7]
1
교황과 황제가 대립하던 시대의 황제로서 다난한 생애를 보낸 비운의 황제이다. 아버지인 하인리히 3세의 죽음으로 6세 때에 국왕에 즉위하고, 모후(母后) 아그네스가 10년간 섭정한 후에 16세에 국정을 친정하였다. 모후가 섭정으로 있는 동안 왕령(王領)의 많은 부분이 상실되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지방제후(地方諸侯)들과 대립하였으며, 그 결과 반란을 초래하였으나 라인 시민들의 원조로 가까스로 진압하였다. 제후들과의 대립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와중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의 사이에서 서임권(敍任權) 문제로 충돌하여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교황을 폐위시키자는 제후의 결의(決議)로써 그에 맞서려다가 반란이 재발하여 궁지에 몰렸다.
1077년 이탈리아의 카노사에서 교황에게 사면(赦免)을 간청하여 겨우 파문의 해제를 받는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을 겪었다. 그 후 세력을 만회하여 제후들을 진압하고, 이어 그레고리우스 7세를 로마에서 축출하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왕후와 장남 콘라트에게 배반을 당하고, 이어 차남인 하인리히 5세에게 감금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
<카노사의 굴욕>
1076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는 서임권을 둘러싸고 충돌, 파문과 폐위선언으로 서로 대립하였으나, 77년 역대 황제들의 집권정책에 불만을 가진 제후들이 파문이 취소되지 않을 경우 왕을 폐위키로 결의함으로써 하인리히는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자신이 폐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하인리히는 같은 해 북(北)이탈리아의 카노사성(城)에 체재 중인 교황을 방문, 카노사성 밖의 눈 속에서 3일간 서서 굴욕적으로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교황은 독일 제후(諸侯)와 동맹할 수 있는 호기(好機)를 놓치게 된 반면, 황제는 시간을 벌게 되어, 실리(實利)면에서 황제의 정치적 승리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제주큰동산 역사뜨락 > 서양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9.11때 공중에서 찍은사진 (0) | 2007.11.03 |
---|---|
[스크랩] 세계 보도 사진(1955~2006) (0) | 2007.11.03 |
[스크랩] 신 세계 7대 불가사의(펌) (0) | 2007.10.02 |
[스크랩] `대영제국` 을 세운 거대한 여걸, 빅토리와 여왕. (0) | 2007.08.08 |
[스크랩] 러시아 황제 일가 사진. (0) | 2007.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