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알버트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 안에서
남편 소리가 들렸다. "여왕입니다." 안에선 아무 응답이 없었다. 다시 문
을 두드렸다. "여왕이에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말을 바꿨다. "당신
의 아내에요." 그제야 방문이 열렸다. '여왕'도 남편 앞에선 아내일 뿐.
빅토리아는 그러나 여왕 이상이었다. 팍스 브리태니카의 상징이었다. 그
의 죽음은 곧 19세기 패자 대영제국 시대의 종언을 뜻했다. (홍사중)
1901년 1월 22일 런던은 잿빛이었다. 국민들은 슬픔에 잠겼다. 창녀들까
지 검은 옷을 입고 '휴업'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한 것이다.
시인 로버트 브리지스는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초석이 떨어져 나간 느
낌"이라고 했다. 70세 이하의 영국인은 다른 군주 밑에서 산 것을 기억하
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최장수 군주 빅토리아 여왕 재위 64년은 영국의 영광 그 자체였
다. '빅토리아 시대'는 확장과 정복, 승리와 번영의 동의어였다.
원동력은 18세기 후반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산업 혁명. 1858년 인
도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것을 비롯, 빅토리아 사망 당시 대영 제국은
전세계 모든 대륙에 걸쳐 있었으며 넓이로 따져 1,100만 평방 마일(지표
면적의 약 20%), 인구로 따져 4억인(전세계 인구의 약 25%)을 '지배'하
고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란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이 시대 영국
은 세계의 '공장'이자 '은행'이었다. 1850년 전세계 공업 생산의 28%를
영국이 차지했고 강철의 70%, 면직물의 50%가 영국 제품이었다. 또 전세
계 상선의 3분의 1이 영국 소유였으며 금융 자본의 90%가 파운드화로 결
제됐다.
경제 지표뿐만 아니다. 유사 이래 신이 창조한 것으로 믿고 있던 인류사
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종의 기원'이 나온 게 빅토리아 시대였다.
빅토리아 여왕 후손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은 유럽 국가가 없
을 정도였다.1819년 켄트공작의 외동딸로 태어난 빅토리아는 독일 출신
알버트 공작과 사이에 4남 5녀를 두었고 이들은 프로이센, 러시아 등 7개
국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로 불렸
고 세상을 떠났을 때 37명의 증손자가 유럽 전역에 퍼져 왕실 네트워크
를 형성하고 있었다.
나라의 번영은 그러나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과 동의어가 되지 못했
다. '두 도시 이야기(찰스 디킨스 1859년 작)'는 부의 편재로 인한 도시
빈민 문제가 비등점을 넘어서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었다. 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이론의 핵심을 담은 '자본론'을 대영 도서관에서 집필하고 있었
던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빅토리아 여왕 사망 후 아들 에드워드 7세가 왕위를 계승해 각종 시책을
펼쳤으나 기울어가는 제국의 운명을 되돌이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9세
기를 풍미했던 팍스 브리타니카는 1931년 그동안 국제 결제 수단으로 통
용되던 파운드화 지위가 파운드화 사용권 내로 제한되면서 공식적인 종말
을 맞게된다. 빅토리아 사망 30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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