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2일 08:32 미국 오레곤주대학(OSU)이 소장한 폴링(Pauling, Linus Carl)의 노벨평화상 메달(1962년)
미국의 화학자 폴링은 양자역학을 화학결합과 관련지어 분자구조에 관한 연구에 적용하여 노벨상을 2번 받았는데, 1962년에 평화상을 받았다(평화상은 핵무기의 국제적 통제를 위한 그의 노력과 핵실험 반대운동에 대한 공로로 받았음). 1972년에는 국제 레닌 평화상을 받았다.
핵무기 감축운동 핵무기 개발 후 그는 무기실험과 관련된 방사선이 노출됨에 따라 유발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깊이 우려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그의 저서인 〈전쟁은 이제 그만! No More War!〉(1958)에 피력했다. 그는 1958년 1월 핵무기실험 중단을 촉구하는 전세계 1만 1,021명의 과학자에 의해 서명된 청원서를 국제연합(UN)에 제출했다. 그는 1963년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을 떠나 샌타바버라에 있는 민주주의 제도 연구 센터의 연구원이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주로 평화와 전쟁 문제에 관한 연구에 전념했다. 1963년에 1962년 노벨 평화상을 폴링에게 수여하는 공식이유는 발표되지 않았지만, 그가 수상한 것은 같은 해에 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다. 그의 평화주의적 견해로 제2차 세계대전중에 그가 과학연구개발국에서 문관으로 있었을 때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많은 과학자와 사이가 나빠졌다. 그는 미국과 소련의 핵실험에 똑같이 반대했지만 미국에 대한 그의 충성은 몇몇 보수적 정치집단에서 의문시되었다(→ 평화주의). 1969년 그는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교육정책에 항의하여 산타바바라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2년 동안 있었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스탠퍼드대학교 화학과로 갔으며, 1974년 그 대학교의 명예교수가 되었다. 2번의 노벨상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그는 과학자와 평화주의자 집단에서 널리 인정을 받았으며, 미국과 외국의 많은 대학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과학자로서의 그의 성공은 새로운 문제에 대한 빠른 통찰력, 상호관계를 인식하는 능력, 그리고 비정통적 생각을 내놓은 용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의 생각이 항상 옳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토론과 탐구를 복돋워 주었다.
글 : A.J. Ihde, 사진편집 : 폴링의 노벨평화상 메달(1962년), 제주큰동산, 2009.07.22.08:32, 미국 오레곤주대학(OSU)
|
'제주큰동산 세계자연 > 여러 나라 돌아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히말라야의 보물 석청 사냥(1) (0) | 2013.09.20 |
---|---|
[스크랩] 선명한 UFO 영상 (0) | 2013.09.20 |
[스크랩] 폴링의 노벨화학상 메달(1954년) (0) | 2013.09.20 |
[스크랩] 미국 역사의 태동지 보스턴(1) - MIT와 하버드 대학 및 하버드 스쿠웨어의 도보 여행 (0) | 2013.09.20 |
[스크랩] (동영상) 중국 황산 구름 이동 (0) | 2013.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