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란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선생이 제주목사겸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 재임 당시인 숙종28~29년(1702~1703)에 제주도 관내를 순력하면서 자연, 역사, 산물, 풍속 등을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41폭의 채색그림으로 그리게 한 화첩. 표지는 청회색 무늬가 있는 고급 비단으로 表具되어 있다. 자신이 쓴 서문을 보면 1703년 5월에 완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그의 후손들이 관리해 왔으나, 종손 李秀昌씨가 기증하여 지금은 제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과 함께 제주의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재 지정사항 ; 대한민국 보물 제652-6호(1979년 2월 8일 지정)
•소장자 : 제주시
•크기 : 36.4cm×56.8cm(가로×세로)
•면수 : 44면(그림 41, 서체 3)
•역사적 의의 ; ①제주도를 순력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은 탐라순력도가 유일한 것이며, 漢拏壯囑은 제주도를 단독으로 그린 고지도로서도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②목사들이 순력하는 대상이 되는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③산천, 도로, 해안, 지형, 포구 등 제주도의 과거의 지리를 이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④세 고을의 읍성과 관아 건물 배치 상황, 진의 위치와 구조, 봉수와 연대 등을 이해하고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날짜 |
그림 이름 |
지역 |
날짜 |
그림 이름 |
지역 |
1702-04-15 |
漢拏壯囑 |
제주도 |
1702-11-10 |
大靜操點 |
보성리 |
06-07 |
貢馬封進 |
삼도동 |
11-10 |
山房盃酌 |
사계리 |
06-17 |
陞補試士 |
〃 |
11-11 |
大靜拜箋 |
보성리 |
07-13 |
城山觀日 |
성산리 |
11-11 |
大靜養老 |
〃 |
07-13 |
牛島點馬 |
우도면 |
11-12 |
大靜講射 |
〃 |
10-11 |
橋來大獵 |
교래리 |
11-13 |
摹瑟點簿 |
하모리 |
10-15 |
山場驅馬 |
〃 |
11-13 |
遮歸點簿 |
고산리 |
10-29 |
禾北城操 |
화북동 |
11-13 |
明月操點 |
동명리 |
10-29 |
朝天操點 |
조천리 |
11-14 |
明月試射 |
〃 |
10-30 |
別防操點 |
하도리 |
11-14 |
涯月操點 |
애월리 |
10-30 |
金寧觀窟 |
김녕리 |
11-15 |
濟州操點 |
삼도동 |
11-01 |
別防試射 |
하도리 |
11-17 |
濟州殿最 |
〃 |
11-02 |
旌義操點 |
성읍리 |
11-18 |
濟州射會 |
〃 |
11-02 |
首山城操 |
수산리 |
11-19 |
濟州養老 |
〃 |
11-03 |
旌義養老 |
성읍리 |
12-20 |
巾浦拜恩 |
건입동 |
11-04 |
旌義講射 |
〃 |
1703-04-28 |
飛揚放鹿 |
비양리 |
11-05 |
正方探勝 |
정방동 |
날짜 없음 |
柑橘封進 |
삼도동 |
11-05 |
西歸操點 |
서귀동 |
날짜 없음 |
橘林風樂 |
삼도동 |
11-06 |
天淵射帿 |
천지동 |
날짜 없음 |
屛潭泛舟 |
용담동 |
11-06 |
羔園訪古 |
용흥동 |
날짜 없음 |
浩然琴書 |
화북동 |
11-06 |
懸瀑射帿 |
중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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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위 표를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형상 목사는 한 번에 제주도를 다 돌아본 것이 아니라 1702년 6월에는 공마봉진, 승보시사 행사를 했고, 7월 13일 아침에 성산에서 일출을 본 다음 우도에서 말을 점검했고, 10월에는 교래리에서 사냥을 한 후 말을 몰아들이는 행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0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 21일 동안은 화북진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면서 애월진까지 진(鎭)과 현(縣)의 무기와 장부, 곡식 등을 점검하거나 활쏘기, 경노잔치를 베풀고 명승지에서 경관을 즐기기도 하였다. 날짜를 알 수 없는 것 중 橘林風樂과 屛潭泛舟는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고, 浩然琴書는 제주도를 완전히 떠난 것을 그린 것이다.
•기록화적 의의 ; ①실용적 목적을 가지고 그려진 것으로 창의성이나 회화성은 결핍되어 있다. ②진경산수화의 형성과 유행에 영향을 주었다. ③조선시대 행사기록화는 궁중을 중심으로 그려졌었으나 이것은 지방 관아에서 제작된 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 ④구성 형식이 상단(제목), 중간(그림), 하단(부기)으로 되어 있다. 이런 구성 형식은 16세기 전반 계회도(契會圖)의 구성 방식과 유사하다. ⑤인물표현은 주인공(목사)을 다른 인물보다 크게 그리는 하이어라키(Hierarchy)기법, 건물은 평행투시도법으로 나타내었다. ⑥현재 19세기 이전의 궁궐도 작품이 전해지지 않는 실정에서 1703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조선시대 궁궐도의 변천 과정을 유추하는 데 값진 의의가 있다.
* 이형상(李衡祥) : 본관은 전주, 1653년(癸巳)생, 태종의 10세손. 肅宗6년(1680) 별시(別試) 丙科12에 급제(엠파스한국학지식)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경륜으로 재능있는 관리였으나 당쟁의 폐습 속에서 불운을 겪었다. 그 대신 학문의 세계에 몰두하여 다양하고 심오하며 방대한 양(60여종 200권)의 저술을 세상에 남겼다. 그가 제주를 떠날 때에는 고사목으로 만든 거문고 하나와 책뿐이었다고 한다. 이 거문고는 경북 영천 호연정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 순력(巡歷) : 조선 시대에 감사(監司)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회하던 일.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 남방 고을에서는 순력이 있을 때 살찐 소 한 마리를 미리 준비한다. 안채에 매어놓고 깨죽으로 한 달 가량 기른다. 그 소는 기름지고 부드러워 … 지방관은 크게 칭찬하고 고과에 최고의 성적을 매긴다’고 하여 순력의 폐해를 지적하였다. 이형상 목사는 '每當春秋節制使親審防禦形止及軍民風俗謂之巡歷'(봄가을로 매번 절제사가 직접 방어의 실태와 군민의 풍속을 살핀다. 이를 순력이라 한다.)이라고 정의하였다.
* 16세기 전반 계회도(契會圖) : 조선초기 관인들이 풍류의식이나 동류의식에 의해 삼월삼짓날이나 구월중양일 등에 경치좋은 야외나 정자에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친목을 도모했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그렸던 그림. 산단에 제목, 중단에 그림, 하단에 참석자의 좌목을 부기하였다. 이 방식은 우리 나라에서만 전개되었고 17세기 후반부터 소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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