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큰동산 역사뜨락/제주도 향토사

제2절 군현시대의 탐라(3) - 대표적인 수령(선정관 또는 목민관)

제주큰동산 2007. 11. 11. 23:30
 

 3. 지방관(수령)


 탐라는 고려에 예속되면서 성주의 권위는 약화되고 대신 현령, 목사,부사, 판관 등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京來官)이 부임하여 통치하였다. 이들 중에는 탐라가 王京과 멀리 떨어진 조건을 기화로 폭정과 착취를 일삼는 자들이 있어서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선정관으로서 이름을 길이 남긴 목민관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은 다음과 같다.


  최척경(崔陟卿) : 숙종 10년에 탐라가 군현으로 개편된 후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 중, 기록상에 남아있는 최초의 인물이다. 의종 16년(1162)에 탐라 현령으로 도임한 그는 민폐를 없애고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도임한 수령들의 폭정으로 良守의 난(1168)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왕이 최척경을 불러 다시 탐라 현령으로 보냄으로써(의종 22년, 1168) 탐라에서 일어났던 반란이 무사히 진압되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열전 최척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판이부사 崔允儀가 최척경이 청렴하고 강직하다는 말을 듣고 탐라령으로 제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최척경은 두 번째 외방 근무가 되고, 또 임지가 너무 멀고 벽지였으므로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자 崔允儀는 최척경에게 “탐라는 지역이 멀고 풍속도 흉악하여 다스리기가 사실 곤란한 곳이기 때문에 자네에게 이를 부탁하는 것이니, 자네는 꺼려하지 말고 가서 그 곳 백성을 어루만져 나라에 근심이 되지 않게 한다면 마땅히 좋은 벼슬로써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최척경이 부득이 부임하여 주민의 이익을 도모하고 폐단을 고쳐 주었으므로 백성이 모두 편안하게 여겼다.

 최척경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최윤의가 사망한 뒤였다. 살림이 빈곤하여 살아갈 수 없었으므로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마침 전라도 안찰사가 급보를 올려 보고하기를, “탐라인들이 후임 令尉의 침폭에 시달려 반란을 일으키고 󰡐만약 최척경을 수령으로 삼는다면 마땅히 무기를 버리고 해산하겠다󰡑고 한다” 하였다. 왕은 “이와 같은 어진 사람이 있는데 어찌 기용하지 않겠느냐”하고 불러서 비단을 하사하고 곧 탐라령에 임명하였다. 최척경이 가족을 함께 데리고 부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탐라에 임명된 자가 아내와 함께 부임한 것은 최척경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탐라인들이 최척경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배를 마련하여 그를 맞이하였고, 탐라에 들어서자 다들 창을 내던지고 땅에 업디어 절하면서 “공이 오셨으니 우리들은 다시금 살게 되었습니다.”하고 전과 같이 안정되었다.」

  또한 최척경의 인품과 관련하여  《동사강목》명종 16년(1186) 6월조에는, 「비서감 최척경이 卒하였다(67세). 척경은 성품이 청렴하고 개결하여 가는 데마다 명성을 쌓았다.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을 잘 다스린다고 소문이 났으며 청렴한 명성과 굳센 절개를 늙도록 잃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조동희(趙冬曦) : 의종 22년(1168) 良守의 난이 일어나자 탐라안무사(안무사는 지방에 어떤 사변이 일어나거나 재난이 벌어졌을 때 그 정황을 파악하고 그 곳 주민들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파견하는 임시직)로 도임하여 절도 있는 선유로써 백성을 무마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김 구(金 垢) : 고종 21년(1234) 21세 때에 제주 判官에 부임하였다. 예전부터 밭 경계가 없어 토호·권세가에 의한 토지 침탈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알고서 돌담을 쌓아 밭 경계를 만들게 하니 그 후로는 타인에 의한 토지 잠식의 폐가 사라지고 우마 침입과 풍해까지 방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위의 많은 돌들이 밭 돌담으로 이용되었으므로 경작에도 편하여 민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때부터 오늘날 제주 밭 경계의 돌담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경세봉(慶世封) : 고종 때 제주 부사에 도임. 청렴 결백하여 후세 사람들이 청백리라 하였다.


김지석(金之錫) : 井奇와 李著라는 두 사람은 일찌기 제주 수령이 되었으나

부정축재의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그 뒤를 이어 김지석이 고종 46년(1259)에 제주 부사로 부임하였는데, 그 날로 豆馬의 貢(남자15세 이상은 해마다 콩 10말, 衙吏들 수백 명은 해마다 말 1필을 바쳤는데 부사와 판관이 이것을 나누어 가지니 비록 가난한 수령이라도 제주도에 오면 모두 부자가 됨)과 같은 구 폐습을 제거하고 청렴한 아전 10명을 뽑아 관청의 모든 일에 힘쓰게 하는 등 물과 같이 정사가 맑아 고을 사람들이 “앞에는 경세봉이 있고, 뒤에는 김지석이 있다”고 하였다.


최 서(崔 瑞) : 충렬왕 21년(1295)에 기록상 나타나는 최초의 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명환이라 하였다.


이백겸(李伯謙) · 송 영(宋 英) : 이백겸은 충렬왕 때 목사로 도임하여 공정히 정사를 보아 백성들이 심복하였는데 그 후 제주에 도임된 대호군 張公允과 부사 張允和의 폭정으로 충숙왕 5년(1318) 2월에 使用·金成등이 난(일설에는 士用·嚴卜의 난) 을 일으켜 성주·왕자를 축출하고는 “전 목사 이백겸이나 송영이 와서 무마한다면 어찌 감히 반란을 일으키겠는가”하였다. 이 때 난민들이 그들의 파견을 요청한 이유는 그들이 제주목사로 재임할 당시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즉 송영은 충선왕 2년(1310), 이백겸도 거의 같은 시기에 재임한 바 있었다. 충숙왕 5년 이 사건으로 조정에서는 송영을 제주 목사로 다시 임명하였고, 반란 요인이 된 장공윤 · 장윤화는 巡軍獄에 가두었다가 紫然島와 靈興島로 귀양보내고 백성들을 무마하여 안정시켰다.


임 박(林 樸) : 목호의 난이 일어날 당시인 공민왕 16년(1367)에 제주선무사로 부임하였다. 《고려사》열전 임박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민왕)16년(1367)에 (임박을) 제주선무사로 삼았다. 임박이 제주에 이

르러 萬戶에게 타이르기를, “몽고의 목자(達達牧子)가 반발하기를 좋아하니, 자네는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그들을 순화시켜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하고 또 왕자·성주에게는 “자네들은 神人의 후손으로서 신라에 복속하여 성주가 되었고, 本朝에 와서도 왕자가 되어 역대의 임금이 그대들

에게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으니, 자네들은 마땅히 각기 한 마음으로 조정을 받들어 목자와 더불어 난을 선동하지 말라”하니 성주·왕자 및 군민들이 모

두 부복하여 “감히 명을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선무하러 온

자가 대개 탐욕스러워 재물을 제멋대로 거두어들임으로써 백성들이 이를 괴롭게 여겼는데, 목호들이 이들을 꾀어 자주 난을 일으켰다. 임박이 부임하는 길에 나주에 도착하여 마실 물을 항아리에 긷고 가서는 비록 물 한 모금 차 끓인 것 한잔이라도 입에 대지 아니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여 서로 “진실로 성인이 오셨다. 왕이 파견한 관원이 모두 임선무와 같다면 우리들이 어찌 난을 일으키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주민들 중에는 그가 마실 물마저 긷고 간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였음을 얘기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충혜왕 때의 田祿生 · 안무사 曹益淸, 공민왕 때의 도순문사 尹時遇 ·안무사 林熙載 · 목사 朴允靑 · 목사 成俊德 · 안무사 李夏生 등도 선정으로 백성을 진무하고 원 목자들의 횡포를 막는데 공이 컸다.


 ● 참고문헌

① 濟州道, 『濟州道誌』第1卷, 1993 . 

② 朴用厚 , 『濟州道誌』, 白映社 , 1976 .

③ 濟州道敎育硏究院, 『濟州敎育通史』,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