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큰동산 역사뜨락/제주도 향토사

제3절 삼별초의 항쟁(2) - 고려와 몽고의 회유책, 삼별초의 평정

제주큰동산 2008. 1. 8. 11:45
 

 4. 고려와 몽고의 회유책


  삼별초가 탐라에서 세력을 떨치게 되자 고려에서는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으며 한편 몽고로서는 일본정벌을 추진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는 삼별초가 큰 장애물이 되었다.

  이 때 원 세조는 삼별초 토벌 방책을 강구케 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과 합작하여 우선 회유책을 써서 고려 조정으로 하여금 김통정의 친척과 黨類를 몰색하여 탐라에 보내어 김통정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김통정의 조카인 낭장 金贊, 李邵, 吳仁節 등을 탐라에 보냈으나 삼별초는 金贊 만을 살려두고 모두 죽여버렸다.


 5. 여몽 연합군의 삼별초 평정


  삼별초에 대한 회유책이 실패하자 원종 14년(1273) 4월 몽고와 고려 조정에서는 여몽 연합군을 재편성하여 탐라정벌을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고려는 金方慶을 중군행영병마사로 삼고 元軍은 炘都와 洪茶丘가 영솔하였는데 연합군 수는 10,000명, 병선 수는 160척, 전라도를 출발, 추자도를 경유하여 동년 4월 28일 아침 조천 함덕포에 상륙하였다. 한편 左軍 30척은 비양도 방면으로 直航한 다음 싸움에 대비하고 있었다.  함덕포에 상륙한 김방경은 관군을 독전하여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삼별초의 복병을 격파한 후 항파두성에 접근하였고 비양도에 대기 중이던 30척 병선도 右軍과 때를 같이하여 귀일촌 해안으로 회항 상륙하여 항파두성을 공격하였다.

 이렇듯이 상륙전을 비롯하여 파군봉 전투, 항파두리 전투, 붉은 오름 전투 등 삼별초와 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삼별초군은 병력이 함덕과 명월에 분산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세한 연합군의 급습으로 방어할 도리가 없어 몰락하고 말았다. 김통정은 부하 70여인을 데리고 內城을 탈출하여 한라산 중으로 도망하였다가 아흔아홉골 부근에서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김방경은 諸將을 거느리고 내성으로 들어가 잔여 세력을 평정하고 투항한 士女 1,300명과 함께 귀환하였다.

 

 

 ● 참고문헌

 ① 濟州道, 『濟州道誌』第一卷, 1993.

 ② 濟州大學校 , 『鄕土文化史 ( 敎材用 )』, 1984 .

 ③ 金宗業, 『耽羅文化史』, 1986.

 ④ 金庠基,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對하여>,『東方文化交流史論攷』, 乙酉

    文化社, 1948.

 ⑤ 曺康煥, 『歷史의 古戰場』, 三潮社,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