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큰동산 역사뜨락/제주도 향토사

제2절 군현시대의 탐라 - 표류인과 표도인(1)

제주큰동산 2007. 12. 14. 17:53
 

6. 표류인과 표도인(漂到人)


《高麗史》원종 원년(1260) 2월 경자조에 의하면 “제주는 해외의 巨鎭으로 송나라 상인과 왜인들이 수시로 왕래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고려시대의 탐라가 중국과 일본간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여 양국 사이를 오가는 선박들의 중도 기항지로서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惡風을 만나 평상시의 해로를 이탈한 선박들의 표착지이기도 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탐라의 선박도 예측불허의 풍향과 풍력에 의하여 중국, 일본, 동남아 등지로 표류하였는데 다음의 기록들은 어디까지나 생환되었던 예에 불과하며 조난을

당한 채 행방불명이 된 것까지를 포함하면 상당히 많은 수의 조난 사고가 발생하였으리라 추정된다.


 가. 주변국에서 탐라로의 표도 사례


 (1) 송에서 탐라로

고종 27년(1240) 5월, 송나라 명주항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던 승려 聖一國師 일행이 6월 그믐날 제주도 연안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가 4일 뒤에 일본의 하카다(博多)에 도착하였다. 《朝鮮學報 21·22 合輯》


 (2) 일본에서 탐라로

고종 31년(1244) 2월 계유일에 有司에서, “전 제주부사 盧孝貞과 판관 李珏이 재임시에 일본 상선이 태풍을 만나 제주 부근에서 파선되자, 마음대로 상선에서 綾絹, 銀, 珠玉 등을 탈취하였다.”고 탄핵하자, 왕은 盧孝貞에게 은 28근을, 李珏에게는 은 20근을 각각 징수한 다음 섬으로 유배시켰다. 《高麗史》

원종 4년(1263) 6월 일본의 官船大使 如眞 등이 불법을 닦고자 송으로 가다가 폭풍으로 표류하여, 승려·속인 합계 230명은 開也召島에 대피하고, 265명은 군산·추자 등지에 대피하였는데, 이 때 왕은 전라도 안찰사에게 명하여 이들에게 양식과 배를 주고 그들의 나라로 호송하여 준 일이 있다. 《高麗史》

충렬왕 18년(1292) 5월에, 일본 상선이 제주도 해안에 정박하자, 탐라인들이 이 배에 화살을 쏘며 습격하여 2명을 사로잡아 중앙으로 압송했다. 이에 고려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元에 보고했더니, 세조가 그들을 일본으로 돌려 보내라고 하였다. 《高麗史》

충숙왕 13년(1326) 元으로부터 귀국하던 일본 상선이 제주도 해안에서 암초에 걸려 좌초되었는데, 이 때 땔감과 물을 구하려고 섬에 상륙했던 일본인 70명이 탐라인들의 습격을 받아 살상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고려 관원(현령)이 元의 泰定帝에게 보고했더니 태정제는 조서를 내려 배를 수리하고 살아남은 자에게 식량을 지급하여 일본으로 돌려보내게 했다. 《朝鮮學報 21·22 合輯》


 나. 탐라에서 주변국에로의 표류 사례


 (1) 탐라에서 중국으로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인 曾鞏의 《元豊類藁》에「고려국의 託羅(탐라)사람 崔擧 등이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泉州 지경에 이르렀는데, 마침 고기잡이 배를 만나 모두 구조되었다. 이후 그들은 고기잡이 배를 따라 바다에 나가 해산물을 채취하여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그런데 뒤에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여, “명주에 가서 선편을 기다렸다가 귀국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천주에서는 船路의 여비를 지급하고 사람을 딸려 보내어 그들을 명주로 호송하였다.」

선종 5년(1088) 7월 탐라에서 표류한 用叶 등 10명을 소환했다.《高麗史》

숙종 2년(1097) 6월 갑오일에 송에서 子信 등 3명을 소환시켰다. 당초 탐라인 20명이 표류하여 裸國(사철 더워 옷을 벗고 사는 나라라는 뜻)에 들어 갔다가 모두 피살되고 오직 子信 등 3명만이 탈출하여 송에 들어 갔다가 이 때에 돌아왔다. 《高麗史》

숙종 4년(1099) 정월에 송은 탐라인으로 표류한 趙暹 등 6명을 소환시켰다.《高麗史》

예종 8년(1113) 6월에, 진도현 사람 漢白 등 8명이 장사하러 제주도로 들어 가다가 바람으로 인하여 송의 명주에 표착하였는데, 이 때 명주에서는 황제의 명으로 비단 2필과 쌀 2섬을 주어 돌려 보내었다. 《高麗史》

고종 16년(1229) 2월 을축일에 송나라 상인 金仁美 등 2명이 제주의 표류민 梁用才 등 28인과 함께 왔다. 《高麗史》


 (2) 탐라에서 일본으로

현종 20년(1029) 7월 을유일에 표류했던 탐라의 貞一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이에 앞서 貞一 등 21명이 바다에 나갔다가 표류하여 어떤 섬에 이르렀는데, 그 섬사람들은 키가 크고 온몸에 털이 났으며 언어가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들 일행을 7개월 동안이나 억류시켰는데, 貞一 등 7명이 몰래 작은 배를 훔쳐 타고 동북쪽으로 향하여 일본 那沙府에 이르렀다가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高麗史》

덕종 원년(1032)탐라인 8명이 표착했으므로 일본은 그 처치에 대해서 협의한 일이 있다. 《朝鮮學報 21·22 合輯》

문종 32년(1078) 9월 계묘일에도 일본에서는 탐라의 표류민  高礪 등 18명을 돌려 보내었다. 《高麗史》


 ● 참고문헌

① 濟州道, 『濟州道誌』第一卷, 1993. 

② 『高麗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