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 인
몽고에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후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이에 불응한 삼별초의 혁파를 결의하였다. 이에 裵仲孫 등은 承化侯 溫을 추대하고 “ 이제 출륙 환도함은 치욕적인 굴복이며 또한 삼별초의 해산은 부당하다 ”하며 항몽 투쟁의 무력봉기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1천여 척의 함선에 병사와 주민과 군수물자를 싣고 진도에 이르러 용장성을 구축하고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1년 남짓 항쟁을 계속하였다.
2. 탐라의 방어 상황
제주도에서는 삼별초가 진도에서 패전하기 이전부터 이미 전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최후의 항쟁지가 제주도가 되리라는 예상을 한 것은 삼별초나 여원 연합군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고려는 여몽 연합군 이 진도를 공격하기에 앞서 삼별초의 내침을 막기 위하여 영암부사 金須로 하여금 병사 200명을 주어 제주에 들어가 삼별초의 내침에 대비하게 하였고 1270년 9월에는 장군 高汝霖이 병사 70명을 거느리고 제주에 들어와 해안선 300리에 장성을 쌓았다.
한편 삼별초 측에서도 1270년 11월에 別將 李文京이 병력을 이끌고 명월포에 상륙하였다. 그리하여 州의 동쪽 東濟院(제주시 별도천 동쪽, 화북동)에 포진하고 松淡川(제주시 화북과 삼양동 경계) 싸움에서 관군을 전멸시켰는데 이 싸움에서 金須와 高汝霖도 전사하고 말았다. 탐라 점거전에서 승전 후 李文京은 진도의 삼별초 본영에 보고하고 수륙교통의 요충지인 조천포에 진을 치고 제주도를 호령하기 시작하였다.
3. 삼별초의 탐라 入據
원종 12년(1271) 진도의 용장성이 함락되고 배중손 등 중심 인물이 거의 전사하자 별장 金通精은 삼별초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후퇴하였다. 이 때 남해현을 점거해 있던 별장 劉存奕도 합류하여 대부대가 된 삼별초는 지금의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 서남쪽 항파두리를 본진으로 삼고 內·外城을 구축하고 그 서쪽에 涯月木城을 쌓아 최후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 때 삼별초가 축조한 방어시설은 그 규모나 기술로서는 당시 탐라에 없었던 大役事였으며 江都의 것과 비슷하였다고 한다.
원종 13년(1272) 3월부터 원종 14년(1273) 1월까지의 삼별초 활동은 주로 육지연안과 해변 지방을 횡행하면서 유격전법으로 여몽 연합군을 괴롭혔다. 삼별초의 공격 목표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관군의 선박집결지를 습격하고 함선을 소각함으로써 관군의 해상 활동을 무력화시키고,
② 貢米나 보급품을 탈취하여 항전을 위한 자원으로 삼았으며,
③ 지방 관원을 사살 또는 납치함으로써 민심 교란을 기도하여 유격전을
용이하게 하였다. 한편 진도 공격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여몽 연합군은
군사력을 재보강하기 위하여 일시 후퇴하였다.
● 참고문헌
① 濟州道, 『濟州道誌』第一卷, 1993.
② 濟州大學校 , 『鄕土文化史 ( 敎材用 )』, 1984 .
③ 金宗業, 『耽羅文化史』, 1986.
④ 金庠基,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對하여>,『東方文化交流史論攷』, 乙酉
文化社, 1948.
⑤ 曺康煥, 『歷史의 古戰場』, 三潮社,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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