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큰동산 역사뜨락/한국사이야기

[스크랩] 한국 7대 불가사의

제주큰동산 2008. 1. 17. 09:43

 

 

고조선 사람들은 무덤인 고인돌 뚜껑 위에 북두칠성을 새겨 넣었지요. 이를 본받아 고구려, 고려 사람들도 무덤 속에 북두칠성을 그려 넣었어요. 절마다 지어 놓은 칠성각도 북두칠성과 관련이 있어요.

 

아래 왼쪽의 아득이 돌판과 오른쪽엔 돌판에 나타난 구멍의 위치와 크기를 표시한 그림으로 아래부분에 북두칠성과 비슷한 배열이 있다.

 

하늘을 살피고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일은 어느 국가에서나 중요한 일이었다. 종교적이나 정치적인 의미를 떠나서라도 농경을 위해서는 계절을 아는 일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도 별을 관측했을까.

 

지난 10월 20일 충남대 한국우주과학회·한국천문학회에서는 이와 관련해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분석자료가 발표됐다. 다름아닌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된 돌판 위에 파인 수많은 구멍들이 북극 근처의 별자리로 밝혀진 것.

북두칠성을 비롯해 작은곰자리, 용자리, 세페우스자리 등이 확인됐다.  이것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에 화제가 된 돌판은 사실 22년전 고고미술학자 이융조 교수(충북대)가 충북 대청댐 수몰지역을 탐사하다가 발견된 것인데 발견 당시에도 별자리일 가능성이 제기됐으나 증거가 부족했다.

최근에야 천문학자와 공동연구를 통해 별자리임이 밝혀졌다.

 

또한 언론에서는 이번 별자리 확인연구가 마치 눈으로만 이뤄진 것처럼 비쳤으나 사실 이보다 더 객관적인 연구가 있었다. 별자리 분석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서울대 박창범 교수(지구환경과학부 천문학 전공)는 “눈으로 별자리를 확인하는 일보다 컴퓨터를 이용한 객관적인 접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78년 충북 청원군 문의면 가호리 아득이 마을에서 중기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을 발굴했다. 덮개돌 아래 석실에서 청동기 조각, 가락바퀴, 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됐고, 주변에서 돌무덤, 선돌과 함께 돌판 하나가 발견됐다. 고인돌에서 3m 정도 떨어진 땅 속에서 발견된 이 돌판은 가로 23.5cm, 세로 32.5cm에 두께가 4.1cm였고, 표면에는 지름 2-7mm의 크고 작은 홈이 65개나 파여 있었다.

 

먼저 아득이 돌판에 새겨진 구멍들이 별자리임을 확인하기 위해 박창범 교수는 이미 확인된 고구려고분과 북한고인돌 별자리 그림과 비교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많은 별들 중에서 고대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며, 무덤에 기록될 만한 별은 아무래도 이미 확인된 고대인의 별자리 선택기준을 이용하는 방법이 적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득이 돌판에 구멍이 새겨질 당시 밤하늘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당시 별들의 분포는 기원전 5세기로 가정해(우리나라 고인돌이 건설된 시기는 기원전 약 3천년부터 서기 2세기 사이로 알려져 있다) 컴퓨터로 재현했다. 이때 지구의 자전축이 2만6천년을 주기로 회전하기 때문에 별들의 위치가 바뀌는 점을 고려했다. 이런 비교작업은 아득이 돌판 구멍들이 실제 별들의 분포를 얼마나 반영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아득이 돌판 구멍들의 분포를 살펴보면 왼쪽 아래에서 북두칠성과 같은 배열을 이루는 7개의 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배열은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북두칠성의 모습을 뒤집어놓은 것과 같다. 이렇게 하늘에서 땅으로 투영하는 방법으로 그려진 별자리 그림은 고구려나 고려고분에서 종종 관찰된다. 반면 고구려시대의 진파리 4호분(평양시 무진리 소재)의 천장 별그림에서 보이는 북두칠성은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의 모습이다. 두 그림을 비교하기 위해 아득이 돌판의 별그림을 뒤집었다. 또한 함경남도 함주군 지석리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와도 함께 비교했다(위의 두개의 사진참조)


세 별그림을 비교하면 7개의 별이 국자모양을 한 북두칠성이 먼저 눈에 띄고, 북두칠성을 바로 마주보는 위치에 열을 이루는 3-5개의 별, 둘 사이에 C자 모양을 한 5-6개의 별 등이 발견된다. 이런 별들이 완벽한 일대일대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연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일치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컴퓨터로 재현한, 4.5등급보다 밝은 북극 근처 별들의 분포와 비교하면 각각 북두칠성, 작은곰자리, 용자리, 세페우스자리 등에 대응됨을 알 수 있다.


아득이 돌판 구멍들의 분포가 실제 별자리 분포와 유사하다는 시각적 판단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두분포 사이에 통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때 두분포에서 북두칠성의 위치는 확인될 수 있기 때문에 북두칠성의 중간별을 일치시킨 후, 돌판의 각 구멍과 가장 가까운 실제의 별을 찾도록 했다. 결국 돌판 구멍들의 분포와 실제 별자리 분포의 상관관계가 가장 큰 경우, 돌판에서 작은곰자리, 용자리, 세페우스자리 등이라고 생각했던 구멍들을 실제 별자리라고 검증할 수 있었다.

 

돌에 새긴 별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241년에 그렸다는 중국의 순우천문도가 있다. 그 다음이 1395년 조선시대 천상열차분야지도인데, 큰 원 안에 1천4백64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5년 전 박창범 교수는 컴퓨터계산을 이용해 이 천문도에 그려진 별들의 위치가 대부분 2천년 전의 것이고, 일부는 약 7백년 전의 것임을 밝혔다. 조선 초에 새겨진 이 천문도는 놀랍게도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한 다음 일부 별의 위치를 고쳐 만든 것이었다.
고구려 벽화고분 95기 가운데 22기에서 별자리 그림이 발견됐다. 무용총의 경우 벽면에 사신도와 함께 해와 달, 궁수자리에서 나타나는 남두육성을 비롯한 여러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인이 독자적으로 밤하늘을 보고 별자리를 관측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확인된 청동기시대 돌판의 별그림은 이런 고구려의 천문지식에 대한 뿌리를 제공한다. 또한 우리나라의 천문지식이 중국천문학의 전래에 의해서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선대의 고유한 천문지식의 전승이 있었다는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다.

 

 

보통 고인돌 밑에는 직사각형의 석관 또는 구덩이가 있고, 그 위에 덮개돌로 덮어 놓는데, 이 덮개돌에 지름 5 ~ 10 cm정도의 반구형의 홈이 파여져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하늘의 별자리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북두칠성 형태가 대표적입니다. (지금도 '칠성판'이라는 말이 관을 의미하죠.)

같이 출토되어 나온 유적으로 추정한 고인돌의 연대는 보통 B.C.1천 년 ~ B.C.수십 년이기 때문에,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한반도와 만주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별자리에 대한 높은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석판에 새겨진 것도 그러한 맥락이라고 생각되며, 고구려, 고려, 조선 시대의 무덤 안에 그려진 사신도와 많은 별자리 그림도 그러한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북한의 고인돌에는 그러한 성혈이 많다고 하는데, 그 진위를 판별하기 어렵고, 남한의 고인돌 중에서는

박창범 님의 '하늘에 새겨진 우리역사'에서 소개된 충북 청원 아득이 고인돌의 북극 주변의 별자리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사진의 전남 화순 남면 절산리 고인돌의 성혈도 그러합니다.

▣ 전남 화순 남면 절산리 고인돌의 성혈

덧그림의 바탕이 된 사진의 출처는 이영문 님의 '고인돌 이야기' 입니다. 책에는 어떤 별자리인지 적혀 있지 않지만, 여기 새겨진 별자리는 위에 그려진 대로 천상에서 가장 밝은 여름 하늘 은하수 부근을 그리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견우와 직녀' 부근입니다.

은하수를 돌에 새겨 덮은 ... 어쩌면 당시로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장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별의 밝기에 따라 성혈의 크기가 변화되는 것이,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일치합니다.

(중국의 순우천문도는 그러한 면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은, 천상열차분야지도 석판본의 해당 부분입니다.

 

별자리 이름은,왼쪽 위부터, '견우', 하고(강의 북)',

'직녀', 그 아랫쪽에'천진(하늘 나루)'

입니다.중간에 강 모양으로 그려진부분이 은하수입니다.

직녀와 견우는 은하수 밖에,하고와 천진은 은하수 안에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거울에 비친 모습입니다. 별자리는 가끔 오른쪽-왼쪽이 뒤바뀌어 그려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하늘을 보면서 땅에 별을 그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고인돌 밑에 묻힌 사람이 볼 때에는 제대로 보이겠죠.

위의 성혈은 돌이 패여진 부분을 은하수로 삼고 있어 혹 일부러 돌을 깎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서도 천진의 모습은 원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별 하나가 빠져 있긴 하지만, 위-아래를 뒤집으면 본래의 모습이 됩니다. 다음 그림을 보면, 내부, 주변의 별이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사진설명>별의 밝기에 따라 크기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좌표의 개념이 없을 때였을 것이므로, 아마도 별자리의 위치와 방향을 먼저 결정하고 그 위에 별자리의 모양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 사실은, 고인돌이 축조되었을 무렵 이미 위의 별자리들이 이 땅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위의 별자리 모양으로 성혈이 새겨진 연대를 대략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별에는 고유운동이라는 것이 있어서, '하고' 별자리의 중심 별인 '알타이르(외국명)'가 천진 쪽으로 이동해 왔기 때문입니다. 현재 '하고'의 모양은 사진과는 반대 쪽으로 꺾여 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도 마찬가지).

언뜻 보기엔 각도가 대략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고인돌의 성혈과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초벌본은 대략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B.C.100 ~ A.D.100).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또 다른 연대가 제시됩니다. 다음 두 그림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진설명>윗쪽은 Hnsky 의 '천상열차분야지도' 해당 위치의 별자리이고, 아랫쪽은 성혈입니다. 그 중, 동그라미 부분을 보면, 하고 주변에 희미한 세 별이 보입니다. 하지만, 중심 별과의 상대적인 위치가 틀립니다. 어느 정도까지 정확한 값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별마다의 고유한 천구상의 운동 (Proper Motion)을 참조하면, 이전의 별자리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비교적 태양계에 가까운 밝은 별들이 이동하는 폭이 큽니다만, 하고의 경우 특히 형태의 변화가 큽니다.


다음 그림은 각각, B.C.3,000 년 경, B.C.2,000 년 경, 그리고 현재의 하고 (독수리) 별자리입니다. 중앙의 별이 꾸준히 이동해 왔슴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중, 하고의 중심 별 주변의 밝기가 서로 다르게 표시된 작은 세 별과의 상대적 위치를 참조할 때, 성혈의 모습과 가장 가까와 보이는 연대는 B.C.3,000 ~ B.C.2,000 년 경입니다.

 

 

 

 

 

 

 

 

 

화순 지역의 고인돌은 B.C.1,000 경부터 만들어 졌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석판은 우리 민족이 이미 단군조선 초기인 B.C.2,000 년 경에 '천상열차분야지도' 비슷한 형태의 천문도 석본을 보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고인돌은 철기 시대에 들어와 거의 없어졌으므로, 위의 고인돌은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청동기 시대의 유산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평양에 있었다는 원본은 위와 같은 모양의 산과 바다가 그려져 있는 거대한 석판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크기는 지금 석판본의 두 배 정도가 되겠죠.)

 

(후일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고 석판에 누군가가 새겼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겠으나, 천진의 모양 및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누락되어 있는 주변의 별들로 미루어 볼 때, 오히려 천상열차분야지도 쪽이 고인돌의 성혈을 참조로 했다고 생각됩니다.)


'견우와 직녀' 부근은 이들 중요한 별자리가 있을 뿐 아니라, 제 생각으로는 훨씬 그 이전에 전설 속의 인물의 별자리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곳입니다. (어쩌면 '직녀'가 그 위치였을 수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최초의 농경이 B.C.15000 년 경에 시작되어 한창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을 B.C.12000 년 즈음, 북극성은 바로 직녀성이었습니다. 또한, '규원사화'에 따르면, 1만 5천년 전은 신시씨가 치우씨, 고신씨, 신지씨, 주인씨로 인간을 돕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어쩌면 화순 지방이 이들 제왕들이 자리잡고 다스리던 지역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위 고인돌은 고창 매산마을의 고인돌 2333호 입니다. (우연이지만, 고조선 건국연대와 같네요.) 위에 작은 돌이 얹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종교적 의미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좌측 전면에 보이는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세 개의 둥근 원은 위 절산리 성혈로 미루어 보아, 직녀성을 의미하는 성혈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랫쪽의 왼쪽 원 바로 옆에 보이는 작은 원은 겉보기 이중성을 표시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북두칠성과 더불어 많은 바위에 새겨지는 삼각형의 성혈은 직녀성을 의미한다고 가정해 봅니다. 더불어, 직녀성이 약 1만 3천 년 전의 북극성이었던 것과 연계시켜, 이들 성혈들은 그 때의 무엇인가를 기리기 위해 새겨졌다고 믿고 싶습니다. (직녀성은 부도지의 마고를 의미한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벼의 품종개량이 거의 마무리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또한, 경남 함안군 동촌리 고인돌이 있습니다. (참조: 경남 함안의 유적을 소개하는 사이트)

 

▣ 경남 함안군 동촌리 고인돌의 성혈

석판에는 모두 398 개의 성혈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성혈에는 각각을 연결하는 선이 있어서 당시 많이 알려져 있는 별자리를 그렸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서양의 전갈좌(방수, 심수, 미수)를

많이 닮아 있는 성혈들이 있고.

삼수(오리온 자리)와 필수(황소자리)를

닮은 배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하늘에서 이들 심수와 삼수는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어서 만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왼쪽 사진과 같습니다. (함안 사이트의 그림에 덧칠해 보았습니다.)

즉, 있는 그대로를 그린 것이 아닌, 주요 별자리만을 표시했다는 것입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경우에도, 위치에 따라서는 별이 적은 곳은 공간이 생략되어 연결된 경우가 있습니다. 위 성혈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하단부에 방수 (별 하나가 빠졌습니다만 ...), 심수, 미수가 이루는 서양의 전갈자리가 있고, 그에 연결하여 기수가 보입니다.

우측에는 오리온의 사다리꼴로 유명한 삼수가 보입니다. 그 우측에 표시된 파란색 화살표가 묘수 (플레이아데스) 이며, 우측 하단부 구석의 주황색 화살표로 표시된 큰 별은 아마도 노인성으로 추측됩니다.

상단부 좌측에 위수, 실수가 보입니다. 중앙의 큰 별 몇 개를 둥글게 이어 놓은 것은 위치상 북극오성인 것으로 보입니다. 성혈이 새겨진 연대를 감안한다면

북극 별자리가 2~3개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측 윗쪽으로 보이는 큰 별들은 카시오페이아의 일부로 보이기도 하는데, 가장자리에 놓여서 확실하지 않네요. 성수의 모양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함안 고인돌의 '심수', '묘수' 는 아마도 당시 (B.C.2000 년 경) 의 춘.추분점이 지나는 곳이어서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 별자리들은 각기 여름, 가을, 겨울을 대표하는 별자리이며 당시엔 봄, 여름, 가을을 대표하는 별자리였을 것입니다.

 

많은 성혈들이 오랜 옛적 그 새겨진 석판이 묻히기 전의 밤하늘을 담고 있습니다.


성혈의 모양은, 절산리 성혈의 '천진' 이나 동촌리 성혈의 '심수', '실수' 같이, 다른 별자리들과는 다르게 뒤집어져 있는 모양도 있습니다.

당시 성혈을 새긴 사람들은 실제의 별의 좌표상의 위치보다는 별자리의 모양을 중요시 여겼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별자리 전체의 상대적인 위치는 일치하지만, 실제 모양은 뒤집어져 있는 모양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경남 진주시 남강댐 수몰지구 고인돌의 성혈

다음은 경남 진주시 남강댐 수몰예정지구에서 옮겨진 고인돌의 성혈입니다. (입체사진 입니다.)

덮개돌의 성혈은 무슨 별자리일까요 ...

잔별까지 비교해 보아도, 묘수인 플레이아데스를 많이 닮았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꽤나 아름다운 별자리를 새긴 고인돌이 될 것입니다.

(굉장하다고 밖엔 할 말이 없습니다. 8 ~ 9 등급의 별까지 있네요.)

 

뒷쪽에 보이는 것이 덮개돌 밑에 있던 석관인 듯 합니다. 크기가 작은데, 굽혀묻기를 했겠죠. 이 곳 남강 수몰지구에서는 선사고고학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많은 유물이 나왔다고 하네요.

(청동기 주거지에서 발견된 목탄의 추정 연대 B.C.1420 ~ B.C.1100년, B.C.1400 ~ B.C.1100년) 다른 무덤일 수도 있겠으나, 남강 돌널무덤에서는 이(齒)를 뽑은 풍습과 목이 없는 사람뼈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별자리 또한, 천상열차분야지도나 다른 성혈과 같이 밝은 별은 크게, 어두운 별은 작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운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부분(하늘색 원)도 어두운 별로 기록되었습니다.

 

위의 연대는 단군조선 말기에 해당됩니다.

묘수(昴宿)의 해석으로 볼 때, 무덤의 주인은 환웅씨의 직계 후손, 고조선의 왕족이었던 듯 합니다. 묘수는 호(胡)의 별이며,

모두(들소의 머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무덤에 별자리를 새기는 걸까요 ...)


성혈로 표시된 별들은 거의 대부분 플레이아데스에 속하며, 이 성단의 별들은 거의 같은 고유운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금세공기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최고의 보검

 

동아시아의 유일무이한 유물이다.

 

이기환기자의 기사내용(〈이기환기자 3Dlkh@kyunghyang.com" target=_blank>lkh@kyunghyang.com)

AD 4세기 무렵부터 한반도 동쪽나라 신라에서 갑자기 금문화가 극성기를 이룬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8세기대에 찬술한 일본서기가 신라를 “눈부신 금은채색의 나라”로 표현했을까. 이는 고구려·백제와는 사뭇 다른 양상. 왜 유독 신라에서만 황금문화가 번성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해 유리전문가이자 고미술사가인 일본인 학자 요시미즈 츠네오는 ‘로마문화 왕국, 신라’라는 저서를 펴내 “중국문화를 받아들인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의 뿌리는 그리스·로마문화이며 따라서 신라는 로마문화의 왕국이었다”고 단언, 파장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이 한국어판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지난 30년간 이 책을 쓰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는 요시미즈는 “4~6세기 신라유적에서 출토된 로마유리와 그리스 로마 전통인 누금세공의 장신구류, 황금보검을 비롯한 금은제품, 그리스 로마신화의 성수(聖樹)신앙을 반영한 수목관 형식의 왕관 등으로 미루어볼 때 신라만의 독특한 유물들은 로마문화의 소산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신라왕관의 기본구조는 머리띠인 관테에 나뭇가지 같은 솟은 장식을 꽂은 형태”라면서 “이는 그리스풍의 꽃잎관 코로나와 페르시아식 머리띠 다이아뎀이 결합되어 성립한 서아시아 왕관계통이며 여기에 스키타이 문화와 한반도식의 독특한 문화가 결합되어 완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경주 미추왕릉 C지구 4호분에서 발견된 ‘미소짓는 상감옥’도 주목거리라는 것. 지름 1.8㎝에 불과한 옥에는 피부가 하얗고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 4명이 상감돼 있다. 그는 이것이 로마문화권의 한 지역을 통치하던 왕과 그 가족일 가능성이 크고 그 왕이 자신의 가족 얼굴을 새겨 상감옥을 신라왕에게 선물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태극무늬와 금알갱이 장식이 있는 미추왕릉 계림로 14호분 출토 황금보검은 켈트문화와 신라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하는 유물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에 대한 국내학자들의 시각은 다양하다.

이한상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이 책에 대해 “한편의 완전한 소설이며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BC 3세기께 로마 장신구의 디자인·기법과 AD 4~6세기의 신라 금문화를 비교하는 등 시기적으로도 700~800년이나 차이가 나는 문화를 억지춘향격으로 끼워맞췄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왕과 왕비를 새겼다는 상감옥과 황금보검은 왕의 무덤에서 출토된 게 아니라 작은 무덤에서 나왔다”면서 “로마문화권의 왕이나 켈트왕국이 보낸 선물이 어떻게 소규모 무덤에서 출토됐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저자는 신라가 12간지를 썼던 기록이 있는데도 로마력을 썼다고 주장하는 등 역사에 대한 기본인식도 없다”고 일축하고 “신라의 금문화는 북방 선비(鮮卑)족의 황금문화와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긍정적인 검토도 필요하다는 입장도 있다. 이인숙 전 경기도박물관장은 “사실 신라에서 갑자기 꽃을 피운 금문화의 배경은 아무도 모른다”면서 “해외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신라 금귀고리의 기법은 그리스 기법과 거의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로마유리가 신라에서 출토되고 그것이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왔다면 로마유리만 왔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요시미즈의 주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외국학자의 주장이라해서 무조건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權寧弼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금제품에서는 스키타이-흉노 문화와의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1973년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길이 30cm의 황금 장식 보검은 칼과 칼집을 모두 금테로 장식하고 칼자루에 紅瑪瑙(홍마노)를 嵌入(감입)한 세계적 명품입니다. 이런 모양의 보검은 훈族의 아틸라王이 활약하던 5세기에 그리스, 로마, 이집트, 西아시아에서 유행했다고 합니다. 東아시아에서는 경주에서만 발견되었는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근처의 보로워에 지방에서 몇 점의 발굴 사례를 보이고, 그밖에는 실크로드上의 키질 벽화에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사회 계림로 14호분의 주인공은 어떻게 세계적으로도 이런 희귀한 황금보검을 입수했을까요. 「로마문화왕국-신라」의 저자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씨는 지금의 불가리아에 있던 트라키아의 켈트族 왕이 주문생산을 하여 신라 왕가에 선물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귀중품을 무역상 수준에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트라키아 王의 사절이 황금보검을 휴대하고 직접 신라에 왔든지, 신라 사신이 트라키아에 가서 하사받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李仁淑 요시미즈씨는 트라키아 王이 금세공기술자를 신라에 보내면서 호위병으로서 흉노족을 썼을지 모른다고 추리했습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 금세공기술자는 그리스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금세공에 관한 한 그리스인들이 탁월했으니까요. 그리크 골드(Greek Gold)로 유명한 그리스에는 원래 금이 많이 산출되지 않아서 그리스인들은 실제로 금을 풍부하게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카자흐스탄 지역인 알타이 산맥의 금産地까지 와서 금을 구해 갔음은 헤로도투스가 저술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도 금의 공급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종   목 : 국보 제141호
분   류 : 유물 / 생활공예/ 금속공예/ 무속구
수   량 : 1개
지정일 : 1971.12.21
소재지 : 서울 동작구 상도5동 1-1 숭실대학교박물관
시   대 : 청동시대
소유자 : 숭실대학교
관리자 : 숭실대학교

 

 다뉴세문경이란 초기철기시대에 나타난 청동으로 된 거울로 잔무늬거울이라고 한다. 잔무늬거울의 뒷면에는 거울을 멜 때 사용하는 고리인 뉴가 2∼3개가 있다. 또한 전(前) 시대에 있던 거칠게 무늬를 새긴 거울(거친무늬거울)에 비해, 작은 삼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기하학적 무늬를 세밀하게 새긴 것이 특징이다.

숭실대에서 소장하고 있는 다뉴세문경은 지름 21.2㎝로 뉴가 2개이며 내구(內區), 중구(中區), 외구(外區)로 3등분 되어있다. 각 구마다 작은 삼각형 무늬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세밀하게 장식하였다.


외구에는 동심원 무늬가 2개씩 짝을 지어 균형있게 8개를 배치하였으며, 주석이 많이 들어가 빛이 잘 반사되게 만들었다. 현존하는 잔무늬거울 가운데 가장 크며, 가장 정교하게 무늬를 새긴 것으로 우리나라 초기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강원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이 거울은 현존하는 잔무늬거울 가운데 가장 크며, 동질(銅質)·주조(鑄造)·문양 등의 면에서 세문경(細紋鏡)으로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다뉴세문경은 대개 방울과 함께 발굴된다. 거울[鏡]은 빛, 방울은 소리를 상징한다. 다뉴세문경이 얼굴을 비추는 거울보다는 제사장의 무구(巫具)라 짐작되는 이유다.

 

과학자 이종호박사는 '한국7대불가사의'에서 "거울안에 0.3mm 간격으로 가는 선 13,000개를 기하학적 규칙성을 고려해 화려하게 새겨 넣었다. 확대경과 정밀한 제도 기구를 갖춘 현대의 주조기술로도 만들기 어렵다"며 다뉴세문경을 '불가사의'로 손꼽기도 했다. 당시 다뉴세문경처럼 뛰어난 수준의 청동 주조물은 세계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20cm가 안되는 원내에 깊이 0.7mm 폭 0.22mm로 구성된 13,300개의 원과 직선이 새겨져 있는데, 선의 굵기는 머리카락 같다. 현대의 컴퓨터 기술로도 재현이 불가능한 이 런 청동거울을 기원전 4세기경에 어떻게 만들었는지 여전히 수수깨끼다.

 

사마천의 '사기'는 동이족의 수령인 치우집단이 "머리는 동(구리)이고 이마는 철(쇠)"인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고 전하는데, 이는 이미 금속문명기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사기에서 동이족이 화하족보다 빨리 금속문명을 사용했다고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중국보다 문명이 낮았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아래의 사진은 뉴시스기사 전재

 

 

커다란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이 발견됐다. 숭실대박물관이 소장한 직경 212㎜짜리(국보 제141호)에 비해 60㎜ 가까이 더 크다.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29일 이 다뉴세문경을 공개한 김수영(64·천기도선 대종선사)씨는 “전문가 2인에게 자문한 결과, 아직까지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문화재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출토 장소와 입수 경로 등은 공개하지 않았다.

최근 호남문화재연구원도 전북 완주 갈동유적 5호 토광묘에서 146㎜ 다뉴세문경 2점을 출토했다. 존재가 드러난 다뉴세문경은 30점 남짓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다뉴세문경은 당대 지배계급의 부장품, 즉 매장문화재”라며 확인되지 않은 개인 소장 다뉴세문경이 더 있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다뉴세문경은 현대기술로도 복제가 어렵다고 알려졌지만 2003년 전후로 복제품이 나돈 적이 있다”며 판단을 유보했다.

                                                                  [뉴시스 2007-03-2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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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문양의 극치 '다뉴세문경' 복원제작
[연합뉴스 2006-08-04 11:22]
'다뉴세문경' 복원제작

동국대 곽동해 교수 '송연코팅'기법 제작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정교하고 미세한 문양 때문에 재현이 어렵다고 평가돼 온 청동거울 '다뉴세문경'(多<金+丑>細文鏡. 국보141호.숭실대박물관 소장)을 한 불교미술 전공학자가 복원ㆍ제작했다.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곽동해 겸임교수는 청동주조 전문가 이완규(장인미술 대표) 씨와 함께 한국 초기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인 숭실대박물관 소장 '다뉴세문경'을 모델로 재현ㆍ제작실험을 벌여 성공했다고 3일 말했다.

이 다뉴세문경(잔무늬거울)은 선각 하나하나가 매우 미세해 현대의 컴퓨터 기술로도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평가될 만큼 청동 주조 기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유물. 지름 21.2㎝ 원 내에는 깊이 0.7㎜, 폭 0.22㎜의 1만300여 개의 직선과 100여 개의 동심원이 새겨져 있다.

곽 교수가 밝힌 재현 기술의 핵심은 세밀한 문양의 조각작업과 더불어 활석으로 만든 용범(거푸집)의 송연(松烟)코팅 방법. 송연 코팅이란 소나무에서 채취한 관솔을 태울 때 나오는 그을음을 용범(틀 혹은 거푸집)에 코팅해 주조하는 기술로, 이렇게 주물의 표면이 상하지 않고 거푸집에서 잘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곽 교수는 "송연 코팅 작업이 활석 용범으로 미세한 선각을 주조해낼 수 있는 핵심 기술로, 송연 코팅을 하지 않을 경우, 세밀한 선각의 주조가 불가하며 지금까지 시도된 재현작업들이 모두 실패했던 원인이 바로 용범 송연 코팅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즉, 송연은 오늘날 주조시 거푸집에 바르는 화학성 도형제(塗型劑) 기능을 지닌 '천연 도형제'라는 것.

곽 교수는 "한번 코팅하기만 하면 그 효과가 지속돼 용범 하나만 가지고도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yonglae@yna.co.kr" target=_blank>yonglae@yna.co.kr

 

 

 

 

개마란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고 한다.

고구려벽화에 개마무사가 그려져 있어

우리나라는 5세기에 이미 개마무사가 있었다는걸 인정받는다.

 

서양에서는 개마가 13세기에 나온다.

1221년 페르시아의 우르겐치에서

몽골족과 전투를 벌이는데 이때 개마기록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개마무사는 서양보다 846년 앞선다.

 

 

 

『700년 고구려 역사를 지켜 온 불패의 상징』

 

 당대 최강의 철 제조술과 막강한 구사력을 지녔다는걸 보여주는 개마무사

 

 

한국의 역사가 항상 외적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태조왕과 동천왕은 중국을 수시로 선공하여 기선을 제압했고 차대왕은 중국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고구려의 마면갑

 

 

고구려가 이와 같이 중국을 공격하고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전쟁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 비교적 단순한 전쟁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므로 전쟁 자체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벌인 수많은 전투에서 성공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당시에 고구려가 운용한 전쟁의 기본적인 요소부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마총 총주착개마지상 (평양시 삼석구역 로산동)

그림 가운데를 보면 '총주착개마지상(塚主着鎧馬之像)'이란 한자가 보일 것이다. '무덤 주인이 개마(鎧馬)를 타고 있는 모습'이란 이란 뜻이다. 이 벽화를 통해 고구려에서도 말갑옷을 입은 말, 다시 말해 중장기병용 말을 개마(鎧馬)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목부분이 희미하여 확실하지 않지만 목갑옷(경갑,계항)은 장착하지 않은 듯하다. 가슴갑옷(흉갑,탕흉)은 사람에 가려서 몸통갑옷(복갑,마신갑)과 일체형인지 별도의 갑옷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엉덩이 윗덮개(마수면렴)과 엉덩이 갑옷(고갑, 탑후)는 몸통갑옷과 분리되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말갑옷 그림 중에 조립식 말 갑옷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엉덩이 윗 덮개 혹은 깃대꽂이(기생)에는 쌍영총 보다 더 요란한 장식물이 부착되어 있다. 장례용품인지 평상시 부착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구로는 안장과 등자가 선명하게 식별된다.

 

삼실총 (중국 집안현 통구 태왕향 우산촌) 4세기 말~ 5세기초로 추정

삼실총 벽화의 중장기병 그림은 희귀하게도 실제 전투시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벽화에는 두명의 중장기병이 등장하고 있는데 사람의 갑옷과 말 갑옷 모두 형태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오른쪽 중장기병이 고구려인으로, 왼쪽의 중장기병은 중국 혹은 신라나 백제의 중장기병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른쪽 중장기병의 말갑옷은 목 갑옷(경갑,계항)이 몸통 갑옷과 분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가슴갑옷(흉갑, 탕흉)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른쪽 중장기병 말갑옷의 뒷부분을 보면 몸통 갑옷과 분리된 갑옷을 식별할 수 있는데 말 엉덩이 덮개(마수면렴)를 표현한 것인지 엉덩이 갑옷(고갑, 탑후)을 그린 것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여하간 기본적으로 조립식 말갑옷의 일종인 것 같다.

 

 

말과 사람 모두가 갑옷으로 중무장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기본 전력을 바탕으로 다른 국가가 구성할 수 없는 강력한 부대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바로 유명한 중장기병 개마무사이다.

사실상 고구려가 중국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개마무사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장기병이란 말과 사람 모두 갑옷으로 중무장한 것을 말한다.

 

갑옷은 찰갑(札甲, 미늘갑옷)으로 가죽 편에 철판을 댄 미늘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였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덮은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말에게도 얼굴에는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을 씌우고 말 갑옷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온다.

 

개마무사의 주무기는 창이다.

이 창은 보병의 창보다 길고 무겁다. 기병용 창을 삭(槊)이라 하는데 중국식 삭은 보통 4미터 정도인데 반하여 고구려군은 평균길이 5.4미터에 무게는 6〜9킬로그램 정도 된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대형 파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히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물론 모든 창이 이처럼 길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

 

아! 고구려전시관의 사진

 

이와 같이 개마무사가 밀집대형 혹은 쐐기꼴(∧) 대형으로 긴 창을 앞으로 내밀고 돌격하여 적진을 허물면 대기하고 있던 보병 등이 신속하게 투입되어 전세를 장악하면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전쟁은 항상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고구려가 개마무사 등 중장경기병을 활용하여 전투를 이겼다면 상대방은 곧바로 패전한 이유를 분석하여 이에 대적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효율적인 군편제 운용

 

개마무사의 약점은 말 갑옷의 무게가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몸무게(약60킬로그램)와 갑옷 무게를 합쳐서 8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면 적어도 130킬로그램 이상의 무게를 말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말들에 비해 항상 두 명 이상의 장정이 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병력이 소규모일 때는 재빠른 전진도 가능하지만 대규모 부대가 격돌할 때의 중장기병은 밀집대형을 이루며 매우 둔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우 보병이 오히려 기마병에게 효율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전쟁의 기본이 보병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보병이란 한 사람에게 무기 하나씩 들려주는 정도로 기본적인 전투력을 갖추는 병과이다. 더구나 보병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일단 값이 싸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인적자원만 공급된다면 많은 숫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보병의 약점은 보병 개개인의 경우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일정한 숫자를 확보하지 못하면 보병은 별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병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전제아래 대열을 유지하면서 움직인다. 보병이 대열을 지어 뭉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자신을 죽이려고 준비하는 적군이 몰려오거나 적에게 다가갈 때 누구나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리 없으므로 지휘관은 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경주한다. 병사들이 공포를 떨쳐버리고 자발적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 사기다. 그런데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건 생명체로서 본능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신교육을 잘 시킨다 해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덕흥리 고분 행렬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서기 408년, 5세기 초

덕흥리 고분 벽화의 말갑옷은 희미하긴 하지만 일체형 말갑옷 처럼 보인다. 말 엉덩이 윗덮개의 장식 혹은 깃대꽂이(기생)에 부착된 장식물은 쌍영총이나 개마총의 것보다 작고 간단한 편이다.

말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창을 들고 있는 것 처럼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병사들의 갑옷도 쉽게 식별되지 않는데, 색깔이 갈색인 점을 들어 가죽제 갑옷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대열 지어 장병들 심리적인 안정 유도

 

보병을 운용할 때 개인 활동을 금지하고 대열을 짓도록 하여 장병들이 심리적인 안정을 갖도록 유도한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같이 싸워줄 전우가 있다면 용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보병이 대형을 유지한다는 것도 제식훈련처럼 약간 떨어져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장병들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붙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밀집대형을 이루어 대열 전체가 하나의 기계와 같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무경총요(武經總要)는 증공량曾公亮, 정도丁度 등이 1040~1044년에 걸쳐 집필한 종합적인 병법서적이다. 특정 개인이 기획한 책은 아니며 송나라의 황제인 인종仁宗의 명령에 따라 집필한 것이므로 북송시대의 국가적 프로젝트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말갑옷의 상세한 그림과 세부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밀집대형이 전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고대 그리스군이 숫적으로 압도적인 페르시아와의 전투 결과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유명한 삼각밀집대형을 창안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는 일개 중대를 160명으로 편성하여 한 줄에 20명씩 여덟 줄을 이루고 행진을 했다. 그들 모두 기다란 창과 방패를 갖고 밀집해서 행진을 했으며 적군을 만나면 삼각형으로 형태를 변형하여 수비 태세에 들어간다.

 

 쌍영총 중장기병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 5세기 말(末)로 추정

쌍영총에 등장하는 말갑옷은 조립형 말갑옷에 가깝지만 무경총요의 말갑옷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목 갑옷(경갑,계항)과 가슴갑옷(흉갑, 탕흉)은 구분되지 않고 일체형으로 되어 있으나 목 갑옷과 몸통갑옷(복갑,마신갑)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별개의 갑옷으로 되어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엉덩이 윗덮개(마수면렴)와 엉덩이 갑옷(고갑,탑후)도 몸통갑옷과는 구별되는데, 그림이 희미해져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일부러 구분되게 그린 것인지는 분명한 것 같지 않다.

엉덩이 윗덮개의 장식 혹은 깃대꽂이(기생 奇生)로 생각되는 그림이 기괴할 정도로 커다랗고 요란하게 그려져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쌍영총의 벽화는 현대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세련되고 사실적인 그림풍을 보여주므로 이 커다란 장식이 실제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천으로 된 깃발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마구로는 안장이 확인되나, 등자는 그림이 희미해져서 식별되지 않는다.

말에 타고 있는 사람의 투구는 이른바 '만곡종장판주(구부려진 가늘고 긴 판을 연결해서 만든 투구)'다. 투구의 볼가리개는 투구와 같은 재질로 된 금속제 처럼 보이지만 분명하지 않다. 투구의 복발 위에 장식용 술이 달려 있다. 투구 좌우 측면에 뿔 모양의 장식이 보이는데 단순히 얇은 판 형태의 장식인지 아니면 뿔모양의 장식품을 부착한 것인지는 잘 식별되지 않는다. 목에는 나팔 모양의 경갑이 뚜렷하게 식별된다. 몸통의 갑옷은 찰갑이다. 특이하게도 어깨에서부터 손목까지의 팔 전체가 찰갑편으로 쌓여있어 단순한 상박갑(上膊甲)이 아니라 통수개(筒袖鎧)처럼 팔의 소매 자체가 찰갑으로 만들어진 형태의 갑옷 같다. 허벅지에서부터 발목 부근 까지도 찰갑이 감싸고 있다. 복식사 전공자들은 유고형 갑옷(바지형태의 갑옷)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엔 상갑(치마갑옷)의 측면 모습인지 아니면 유고형 갑옷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울 것 같다. 무장은 창인데 모 혹은 삭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창에도 깃발이 부착되어 있다. 창 이외의 보조무장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 유명한 삼각형밀집방형진이라고 부른다. 전면에 있는 군인이 부상당하면 바로 그 자리를 뒤에 있던 장병이 채우도록 하여 대형 전체는 항상 삼각형으로 유지되었다. 환타생이라고 불린 이 삼각형밀집방형진은 고대 전투 사상 양 측의 병력이 직접 충돌하는 평지의 보병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대형이다.

 

그러므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략했을 때 그리스인들의 이 같은 진형을 정공법으로는 격파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직접 전투를 피하고 포위한 후 화살을 쏘거나 갈증과 허기로 지쳐 쓰러지게 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로마군이 주변국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밀집대형으로 군 체제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로마가 운용하는 밀집대형의 위력을 잘 아는 국가는 로마군의 대형을 먼저 허물어뜨리거나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도록 유도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즉 아군이 적의 대형을 뚫고 들어가 적의 후면이나 측면을 먼저 포위하는 방식을 구사했다. 보병의 대형이 허물어진다면 승패는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대열을 만들 때의 또 다른 장점은 대열에 묶여 있는 병사들이 개인행동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열 중에 있는 병사가 도망가려면 주변 전우들의 행동과 반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열에서 한 두 명이 이탈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곧바로 명령불복종이나 탈영자 등으로 낙인을 찍혀 현장에서 곧바로 처형되기 일쑤다.

 

지휘관들이 탈영자들이 생길 경우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본보기로 처단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보병의 중요성은 보병 개개인은 전투력과 기동력에서 기병보다 떨어지지만 산악지형에 취약한 기병과는 달리 어떤 지형에서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보병은 기병과 달리 무장과 무기의 종류가 다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보병의 역할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될 수 있기 때문으로 일반적으로 경보병과 중장보병으로 분류한다. 경보병대의 주력은 도끼를 맨 도부수이다. 도끼는 내려치는 힘이 매우 강해 투구를 쪼개고 갑옷을 찢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갑옷은 창과 화살같이 찌르는 힘에는 강하지만 베거나 도끼와 같은 강한 충격을 동반한 공격에는 취약하다.

 

중장보병은 기병과 같이 갑옷을 입고 창과 길쭉한 방패를 들었다. 이들이 최정예군으로 경보병처럼 밀집대형을 이루며 보병대열의 최전방에 배치되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이들이 사용하는 갈고리 창은 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임용한 박사는 적었다.

보병이 중장기병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기병은 말이라는 동물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말은 장애물을 싫어하고 겁이 많은 동물이라는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말은 아무리 기수가 명령을 해도 자신을 겨누고 있는 창날이나 장애물 앞으로 무모하게 돌격하지 않는다. 또한 말은 일반적으로 자신에 의해 인명이 살상될 경우 전진하지 않으려고 한다. 

 

영화 「간디」에서 인도의 무저항시민들이 영국의 기병이 돌격하자 말들은 절대로 사람을 밟고 넘어가지 않는다며 대형을 흐트러뜨리지 말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 것도 말의 특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력한 개마무사들이 돌진돌진하면서 적진을 돌파하려해도 수비군이 밀집중장병대로 구성되어 개마무사의 공격에 대항한다면 기병의 특성상 오히려 개마무사가 역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고대 전투에서 보병이 기병을 격파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는 이유이다. 더구나 지형에 따라서는 기병의 활약이 크게 제한되므로 오히려 보병이 전투를 주도하기도 한다. 고구려는 개마무사의 이런 약점을 경기병이라는 또 다른 기병을 투입하여 보완했다. 

 

경기병의 활약

 

보병과 중장기병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경기병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고대 전투에서 현대의 고사포를 발사하는 역할의 궁수가 큰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궁수는 보병과 기병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보병과 기병은 양 군이 접근하기 전까지는 적에게 아무런 타격도 가하지 못한다.

반면에 궁수는 적에게 접근하지 않고도 화살을 발사하여 공격할 수 있다. 즉 궁수는 보병과 기병만으로 구성된 적의 부대를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궁수는 공격 때 아군을 엄호하고 수비 때는 돌격해 오는 적군을 공격하는 임무를 갖는다.

고구려 군이 원거리에 있을 때는 진형의 전열에 서거나 또는 중장보병의 엄호를 받으면서 사격하고 고구려 군이 접근하면 이선으로 후퇴하면서 사격한다. 영화에서 보병이나 기병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자주 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실상 개마무사의 약점은 개마의 무게 때문에 밀집대형을 이루면서 천천히 진격해야 한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중국은 이러한 개마무사의 약점을 파악하고 밀집한 궁수들로 하여금 무차별로 화살을 발사토록 했다. 간단하게 말하여 개마무사들은 진군속도가 느리므로 반드시 집중 공격을 당할 것을 예상하고 궁수들이 발사하는 집중 화망을 뚫고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개마무사가 태어난 것도 기병의 약점 때문이다. 기병은 사람보다 훨씬 체구가 큰 말을 동반해야 하므로 화살의 집중 화망을 뚫을 때 말이 사람보

출처 : 한국 7대 불가사의
글쓴이 : 뚱아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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