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절 민란의 재연
1. 민란의 원인
삼별초 정벌 직후 원은 제주도를 그들의 직할지로 삼았다. 그 당시의 제주 인구 상황은 《高麗史》원종 15년(1274) 2월 갑자조에, 「元이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몽고군과 고려의 병사 1,400명 및 백성 10,223명에게 고려로 하여금 그에 필요한 양곡을 지급하게 하였다.」는 기록에서 그 대략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탐관오리의 가혹한 수탈은 외세의 지배하에서도 계속되었고, 게다가 고려와 몽고의 이중적인 과세와 원의 일본 정벌을 위한 준비 과정에서 목재의 벌채와 운반, 선박 건조에의 동원 등의 가혹한 노역의 징발도 민란 발생의 충분한 요인이 되었다. 당시 제주도민의 생활상과 관련하여,《高麗史》충렬왕 3년(1277) 3월 을묘조에는, 「탐라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문을 닫고 죽는 자가 있으므로, (조정에서는) 崔碩을 보내어 순시케 하였다.」고 하였고, 《고려사절요》충선왕 3년(1311) 7월조에 의하면,「왕이 영을 내려 이르기를, “제주 백성은 사리상 특별히 우대하고 구휼해야 할 것인데, 그 곳의 수령이나 군관들이 제멋대로 약탈을 자행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고 하니, 마땅히 式目錄事를 보내어 그런 행위를 금지하게 하라.”」고 하였다.
또한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 역시 제주도에서 여러 번에 걸쳐 변이 생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시와 해설로 표현하고 있다. 望北風船子(일명 耽羅謠)
머들왓디 보리사 익엉 너무 익엉 누우나마나 (從敎壟麥倒離披) 동산왓디 삼이사 자랑 새움가지 거리나마나 (亦任丘麻生兩岐) 사기그릇 곤을 받앙 득실엉 오키엥던 (滿載靑資兼白米) 하늬 뱃사름만을 눈멜라지게 지드렴서라 (北風船子望來時)
< 梁重海 譯, 『益齋集』小樂府에서 > 이 한역시는 생의 의욕을 잃은 탐라 농민이 농사 일은 접어두고 육지에서 들어오는 배나 바라 보면서 산다는 내용의 노래이다. 탐라 농민들이 제일 바쁜 때란 보리를 수확할 때와 삼밭의 새 순을 딸 때라고 했다. 보리는 다른 곡식과는 달라, 줄기가 약하기 때문에 수확기를 놓치면 꺾어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노력은 몇 배가 더 들어도 수확량은 반감된다. 그리고 곧 우기가 닥쳐 썩어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보리를 벨 때는 '고냉이 손도 빌고 싶다’는 속담이 나올 정도이다.
삼도 마찬가지이다. 삼은 성장력이 왕성하여 성장함에 따라 움터 나오는 곁순을 따 주어야 하는데, 그 시기를 자칫 놓치게 되면 양질의 삼을 얻을 수가 없다. 이규보의 한역시 望北風船子(일명 耽羅謠)에 의하면 밭둑의 보리가 익어 쓰러질지라도, 언덕의 삼이 자라 두 갈래 나건 말건, 푸른 옹기 하얀 쌀 가득 싣고 북풍에 오는 장사군 배만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제현은 또 《益齋集》小樂府에서 말하기를,「탐라는 지역이 좁고 백성은 가난하였다. 지난 날에는 전라도 장사꾼이 때때로 와서 옹기와 나락쌀을 팔아 주었으나, 이제는 팔러오는 이가 드물었다. 지금은 官家와 私家의 소와 말만 들에 가득하고 밭갈이는 하지 않고 오가는 冠蓋(벼슬아치)만이 북같이 드나들어서 전송과 영접에 시달리게 되었으니 그것은 탐라 백성의 불행이었다. 그래서 변이 생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 참고문헌 ① 濟州道, 『濟州道誌』第一卷, 1993. ② 梁重海, <益齋亂藁 小樂府所收 探羅曲에 대하여>,『濟州道史硏究』第3輯, 1994. ③ 高昌錫, <高麗朝 濟州民亂의 性格(補)>,『濟州史學』第3號, 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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