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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라. 차현유(車玄有)의 난

제주큰동산 2013. 9. 20. 20:36

 

라. 차현유(車玄有)의 난

 

  공민왕 23년(1374) 9월 최영이 목호를 토벌한 뒤에도 민란은 계속 발생하였다. 즉 《고려사》에 의하면 우왕 원년(1375) 11월(일설에는 고려사 기록과는 달리 이미 그 이전에 일어났다고 함)에 차현유 등이 관사를 불태우고 안무사 임완(林完) · 목사 박윤청(朴允淸) · 마축사 金桂生 등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최영이 귀경한 후 전령객(典令客) 김중광(金仲光)을 파견하여 유지를 가지고 제도(諸島)를 안무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선조 세종 16년(1434) 8월 조정에 올린 전 참의 고득종(高得宗)의 상소에는 난의 경과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臣의 고향인 제주에는 예전 을묘년(고려 우왕 원년)에 車玄有·芮成의 무리들이 마적이 되었었는데, 그 때에 만호(萬戶)가 군사를 선발하여 이들을 잡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어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이에 도둑이 더욱 성하고 세력을 잡아서 나라를 배반하려고 역모를 꾸며 난동을 일으켰는데, 그 피해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토관들이 나라의 威靈에 힘입어 능히 그 무리들을 평정시켰습니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우왕 원년(1375) 4월조와 《(이문(吏文)》의 제주행병도평의사사신(濟州行兵都評議使司申)에 의하면「최영 등 관리가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간 직후인 10월 6일 제주인 차현유(車玄有) 등이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켜 안무사 임완(林完) · 목사 박윤청(朴允淸) · 마축사 김계생(金桂生) 등을 살해하고 관계관의 방사(房舍)·전물(錢物)을 불태우며, 우마를 차지하였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때문에 전령객(典令客) 김중광(金仲光)이 홍무 8년(고려 우왕 원년) 정월 21일 홍손백(洪孫白) 등을 제주에 보낼 무렵 성주 고실개(高實開), 진무 임언(林彦), 천호 고덕우(高德雨), 제주인 문신보(文臣輔), 천호 고덕우(高德羽) 등이 군사를 일으켜 차현유 등의 적들을 주살하였는데 이때 우왕은 명에 사자를 보내어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金仲光을 제주만호겸목사로 삼아 수어(守禦)케 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살펴볼 때 차현유의 난은 당시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도적이 되어 일으킨 반란으로, 최영에 의한 상당수의 마필 징발도 난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 후 《高麗史》우왕 2년(1376) 5월조에는 목호의 잔여 세력으로 추정되는 합적(哈赤) 강백안(姜伯顔) 등 13명이 난을 일으켰다가 만호 金仲光에 의해 처형되고 그들의 처자는 광주와 나주 등지로 분산, 유배된 일도 있다. 이와 같이 제주에서는 최영의 목호 정벌 이후에도 토착인 또는 목호의 잔여 세력들에 의해 거듭 반란이 일어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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