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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마봉진(貢馬封進)

제주큰동산 2013. 9. 20. 20:51

 

2. 공마봉진(貢馬封進)

 

  숙종 28년 6월 7일 실시. 진상에 필요한 말[馬]을 각 목장에서 징발하여 제주목사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공마봉진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정현감 최동제(崔東濟)를 차사원(差使員)으로 임명하였다. 이 행사는 관덕정 앞에서 이루어졌는데 연례공마와 삼명일(三名日, 正朝 冬至 誕日)에 쓸 것이었다. 당시 진상에 필요한 말은 433필, 검은 소(黑牛) 20수였다.

 

  임진왜란 이후 정조18년(1794) 공마보초등록(貢馬報草謄錄)에 의하면 공마선 10척에 말 298필 수송에 있어서 공마는 연례마(年例馬), 정조마(正朝馬), 동지마(冬至馬), 탄일마(誕日馬), 대징마(代徵馬), 산장진상별마(山場進上別馬) 등과 선장의 이름과 배의 크기는 4~6把(배 길이의 단위=두 팔을 편 길이), 한 배에 28~33필을 수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마에 대한 최초 기록은 고려 문종27년(1073) 팔관회 개최를 축하하기 위해 양마를 진상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제주에서 말을 기른 것은 고려 충렬왕2년(1276) 윤3월 원(元)에서 말 160마리를 가져와 수산평(首山坪)에 방목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사육하던 말들은 원→고려→조선으로 귀속되었다. 조선에서는 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마정(馬政)체제를 확립했다.

 

 

 

  조선시대 마필진상은 연례적으로 공마 200마리, 3년마다 700마리를 바쳤고, 교역상 필요에 따라 징발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밖에 삼명일에 각각 20마리를 진상하였고, 삼읍 수령이 체임할 때 3마리를 헌마하였다. 소는 삼명일에 흑우 20마리씩 연간 60마리이고 교역상 필요에 따라 비정기적으로 수합하였다.

 

  김성구(金聲久, 1641~1679)의 남천록(南遷錄)에 따르면 매년 5~6월 사이에 감영에서 삼읍의 말을 골라 봉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공마봉진의 책임을 맡은 차사원은 조천관에서 바람을 기다려 말을 육지로 보냈다. 말을 실은 배는 반드시 강한 바람이 있은 연후에 비로소 출발하는데 이는 실은 것이 무거울 뿐만 아니라 만약 하루만에 도착하지 못하면 여러 섬에서 머물러야 하므로 말이 많이 상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제주의 공마운임에 대한 기록은 목민심서(牧民心書) 戶典 6條 平賦(下)에 제주에서 공마할 때, 육지에 닿아서 말이 내리면 제주 사람들은 돌아가고 육지 사람들은 말을 몰 줄 모르기 때문에 흩어져 놓치기도 하고 부상을 입어 골절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여러 고을에서 돈과 곡식을 거두어 제주 사람들에게 주고 서울까지 말을 몰고 가도록 하였다. 돈과 곡식이 마음에 충족하지 않으면 말을 흩어지게 하여 벼와 보리를 짓밟게 하면서 며칠을 두고 나가지 않았다.

 

  공마봉선해로(貢馬封送海路)는 공마선이 조천관, 별도포, 어등포, 도근천(외도), 애월포 등에서 정남풍에 출항하여 화탈섬(火脫島:관탈섬)→사서도(斜鼠島)→보길도(甫吉島)→경두(鯨頭)→광아도(廣鵝島)→갈두(葛頭)어란(魚蘭)→영암(靈巖)에 도착하거나, 보길도에서 이진(梨津)의 가리포(加里浦)→강진(康津)이나 관두량 완도(莞島)→해남(海南)에 하륙한다.

 

  그러나 화탈섬(火脫島)까지 왔을 때 안쪽바람이면 추자에 정박해야 하며, 바깥바람일 때는 진도에 정박하여 기다려야 하나 서쪽바람일 때는 흑사도의 홍의도, 가가도(可佳島)→백량(白梁)→외양(外洋:중국, 일본)으로 가며 동쪽바람은 청산(靑山), 서안(鋤安), 삼도(三島), 동여서도(東餘鼠島)로, 남쪽바람은 옥구도(玉球島), 일지도(一岐島:일본 나가사키현에 속한 섬)에 표도(漂到)하는 것이다. 풍랑에 따라 순풍에는 12~24시간에 운송되나 일반적으로 2~4일, 그렇지 못했을 때는 5~10일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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