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큰동산 역사뜨락/제주도 향토사

[스크랩] 조천조점(朝天操點)

제주큰동산 2013. 9. 20. 20:52

 

5. 조천조점(朝天操點)

 

  1702년 10월 29일 순력(巡歷). 조천진(朝天鎭) 성정군의 군사훈련과 인근 제2소 목장의 둔마(屯馬)를 점검하는 그림이다. 조천진의 위치와 연북정(燕北亭)을 비롯한 진내(鎭內)의 건물배치 상황, 민가(民家)의 위치, 해안에 흩어져 있는 여(礖)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그림에는 동서로 길게 지은 군기고, 그 뒤로 동쪽 구석에 자리한 객사, 오른쪽에 마구간으로 보이는 집과 북쪽으로 바짝 붙여 지은 막사들이 뚜렷하다.

 

 

 

 

  조천진은 서산봉수(西山烽燧)와 조천왜포함덕연대를 관할하였다. 조천진의 조방장은 김삼중(金三重)이며, 그 휘하의 성정군은 423명, 군기도 아울러 점검하였다. 한편, 2소 목장의 둔마 505필과 목자 87명을 점검하였다. 말의 점검은 상부 중앙의 그림에 나타난 바와 같이, 우마를 취합하기 위하여 만든 원형목책(圓形木柵)의 원장(圓場)과 취합한 우마를 1두 또는 1필씩 통과할 수 있게 만든 좁은 목책통과로(木柵通過路)의 사장(蛇場)이 표시되어 있다. 특히 사장은 수효의 파악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공마 등의 필요시에 우마를 한 마리씩 붙들 수 있게 된 장치이다.

 

 

 

 

 

  조천진성의 축성 연대는 미상이며 원래 조천성 밖에 있었다고 하나 선조 23년(1590) 이옥(李沃) 목사는 출륙하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무는 곳으로서, 적 침입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포구임을 관민에게 호소하여 농한기를 이용해 성을 축조하게 했다. 2개월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둘레 약 130m, 높이 약 3m의 작지만 짜임새 있는 성을 축조했다. 조천진성은 다른 진성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성문이 하나밖에 없으며 성 주위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독특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둘레가 428자, 높이가 9자였으며,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어서 동쪽 한 곳으로만 통할 수 있다. 9개의 진성 중에서 가장 작았다. 성안에는 조천관·주방·마굿간·군기고 등이 있었고, 동성(東城) 위에는 연북정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연북정은 客舍로서 선조23년(1590) 이옥(李沃) 목사에 의해 성이 중창되면서 쌍벽루(雙碧樓)라 편액했던 것을, 선조32년 성윤문 목사가 중수하고 연북정(戀北亭)으로 고쳐 편액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광무4년(1900) 제주에 온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에 의해 진사(鎭舍) 10칸이 폐지되었다고도 한다. 제주도 지방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조 5년(1781)에 제주에 순무어사(巡撫御使)로 왔다가 돌아가 복명한 박천형(朴天衡)의 서계(書啓) 내용에는 ‘鎭 터가 바다 속으로 쑥 들어가 있어 배가 출항하는 데에 아주 편리하다. 그러므로 진상 물종을 실은 배는 대부분 이 진에서 출항하고 육지에서 들어오는 선박도 대부분 이곳에 도착하여 정박하므로 섬 안의 요로(要路)가 된다. 그러나 성 안에는 우물이 없고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도 없어서 외적이 침입했을 때에 성을 지키기가 어렵다 (濟州巡撫御使書啓朝天防護所 在濟州東三十里 鎭基斗入海中 放船最爲便捷 故凡係進上物種 裝載之船多放於此鎭 陸地入來之船亦多到泊 此亦島中之要路 而但城內無泉井無倉儲 外寇雖來有難守城是白齊)’ 고 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했는데 지금 건물은 1973년에 수리한 것이다. 보수 당시에 〈龍 嘉慶二十五年庚辰二月十五日辰時上樑 虎〉라는 명문이 나왔다. 현대에 이르기 전에 1820년에 마지막으로 보수된 것이다.

 

 

    

                        연북정 옛 모습(일제강점기)                       조천진에 조선소가 있던 1960년대 모습

 

 

  높이 14자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동남향으로 건축했으며 서쪽은 포구이다. 재목을 결합하는 방식이나 기둥 배열 방식이 모두 제주도 주택의 형태와 같다. 즉,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후좌우퇴가 있는 제주 민가형 건물이다. 지붕이 합각지붕으로 된 것만 민가와 다르다. 방형주초에 각주를 세우고 기둥머리에 퇴보를 놓고 여기에 직각으로 장혀를 보내어 도리를 받쳤는데 사괘맞춤(=사개맞춤)한 기둥이 도리를 감싸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내진고주의 보아지와 판대공의 투박한 마무리와 낮은 물매의 지붕, 단청도 없는 간결함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바닥은 퇴칸이 토상(土床)이고 내진에는 우물마루로 해서 사방이 정자처럼 트여 있으나 예전에는 사진에서 보듯이 석축벽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정자가 경찰관주재소로 사용되었다. 현대(1960년대)에 이르러 성의 북쪽을 헐어 조선소로 썼던 적이 있으나 지금은 복원되었다.

 

 

출처 : 제주큰동산
글쓴이 : 제주큰동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