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왜구의 침입
고려 중기부터 있었던 왜구의 우리 나라 침입은 고려 말기에는 더욱 극심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은 제주도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왜구는 주로 해변 촌락을 습격하여 식량을 약탈해 갔고 해변 촌민들은 촌락을 떠나 산간으로 이주하는 경향이 나타나 해변 촌락은 무인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왜구의 침범을 방어할 시설 및 군대 조직이 없으므로 왜구는 마음대로 창궐하여 제주민의 재화를 탈취하고 살상을 자행한 것이다.
《高麗史》등의 기록에 고려 원종 이후부터 왜구의 침입 기사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1260년(원종 1) 왜인들이 수시로 왕래하여 나득황으로 하여금 방호사를 겸하게 하였다. 《高麗史》 ∙ 1323년(충숙왕 10) 6월 왜구가 추자도 등지에서 노략질하여 노약자 남녀를 사로잡아 갔다. 《高麗史》 ∙ 1351년(공민왕 즉위) 왜구가 貴日村에 침입하였다. ∙ 1352년(공민왕 1) 友浦(옛 명칭 범질포 또는 군령포 지금의 용수리)에 침입하였다. 《高麗史》 ∙ 1359년(공민왕 8) 대촌(지금 제주시)에 침입하였다. 《高麗史》 ∙ 1376년(우왕 2) 왜선 6백여 척이 제주에 침범하였으므로 성주 고신걸이 이를 막아내었다. 《東文選 星主高氏家傳》 ∙ 1377년(우왕 3) 왜선 2백 척이 제주에 침범하였다. 전라도수군도 만호 鄭龍, 尹仁祐 등이 왜적이 제주를 침범한다는 말을 듣고, 병선 두 척을 거느리고 정탐하다가 적선 1척을 포획하여 모두 죽였다. 《高麗史節要》 이처럼 왜구가 용이하게 제주 해안을 마음대로 침범하게 된 이면에는 목호들의 적극적인 원호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목호가 왜구와 결탁된 원인으로는 장차 있을 고려의 응징을 두려워하여, 고려 정벌군이 육상에서 목호를 공격하게 될 때에는 해상에서 왜구가 원호하고, 해상에서 왜구를 공격하게 되면 육상에서 목호들이 원호해 주는 일종의 자기방어라는 동일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뭏든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결국 육상에서든 해상에서든 피해를 보게 되는 당사자는 제주민으로서 그 참상은 매우 컸으리라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비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방호시설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高麗史> 원종 2년(1260)에 제주가 해외의 巨鎭으로 송과 왜인의 왕래가 빈번하자 특별히 防護別監을 파견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舊制에 따라 羅得璜을 부사 겸 防護使로 임명한 바 있었으며, 또 충렬왕 28년(1302) 12월경에 봉수대를 설치되는 정도가 파악되고 있을 뿐이다. 탐라의 방호시설과 관련한 기록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 참고문헌
① 金宗業, <三無精神의 硏究>,『濟州道民의 三無精神』, 1983. ② 濟州道, 『濟州道誌』第1卷, 1993. ③ 高昌錫, 『耽羅國史料集』, 新亞文化社, 1995. ④『高麗史』, 『高麗史節要』, 『東文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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