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삼별초 항쟁 관련 유적‧유물
가. 내‧외성 : 당시 김통정이 타원형으로 전장 15리의 내외성을 축조하여 내성은 김통정과 그 측근이, 외성에는 그를 따라 건너온 사녀(士女)들이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 항파두고성 : 내성(在城 또는 宮城)에 해당한다. 김통정 일행이 현재의 위치(귀일촌 항파두리)에 웅거하고 이 성을 쌓아 방어했다고 하며, 성안에는 샘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성의 규모는 둘레 700m정도의 정방형의 석성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건물이 있었던 성 안에는 기와 조각과 가공된 석재가 무수히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더욱이 여기서 습득된 기와 조각에는 당초무늬가 새겨진 軒平瓦 조각과 ⌈高內村‧‧‧ 辛丑二月‧‧‧⌋이라는 명문들이 있어 주목을 끈다. 또 성내의 곳곳에는 색상이 선명한 고려 청자의 파편이 산재해 있고, 거대한 초석이 점점히 흩어져 있는가 하면, 불상도 출토된 바 있어 당시 삼별초의 이모저모를 상상케 한다.
∙고토성 : 외성으로 추정된다. 기록에는 주위가 15리에 달했다고 하였으며, 현재 성벽이 많이 허물어져 있긴 하지만, 대체로 원형에 가까운 높이로 보존되어 있다. 성의 구조는 하부층에 잡석을 깔고(石塊層) 2층에는 진흙다짐(土層), 3층은 잡석과 진흙 그리고 강회 다짐과 진흙 다짐을 한 후 교대로 십수 층을 쌓아 잔디를 입힘으로써 성 위에서 군사와 軍馬들이 다녀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도록 과학적인 공법을 사용하였다. 이 토성은 언덕과 하천을 따라 축성되어 있으며, 성 위에는 항상 나무를 태운 재를 뿌려 놓았다가 적이 침공하면 (말 꼬리에 대비를 매달고 달리게 하여 재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게 하는) 연막전술을 펴서 군세를 과시했다고 한다. 외성의 면적은 약 24만 평에 달한다고 하며, 동서남북 4문이 있고 지리적으로 주위가 하천과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다가 눈앞에 보이는 천연적 요새지였으며, 현재 지방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 환해장성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바닷가를 둘러 쌓았는데, 둘레가 300여 리이다. 고려 원종 때에 삼별초가 반하여 진도에 웅거하매, 왕이 시랑 高汝霖 등을 탐라에 보내어 군사 1천을 거느리고 방어하면서 이 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기사 내용으로 보면, 고여림 등이 삼별초를 방어하기 위하여 미리 쌓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고여림이 제주도에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아 전사하였으므로 300여 리에 달하는 장성을 쌓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으로 보아 이를 삼별초 측에서 쌓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므로 장성의 축조 시기는 고여림 등이 착수하여 그가 전사한 후 삼별초에 의하여 축조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 유적지로 생각되는 일부의 흔적이 애월읍 고내리, 성산읍 온평리와 신산리, 대정읍 영락리, 서귀포시 보목리, 남원읍 태흥리 등에 남아 있다. 이는 높이가 1장이 안되고 두께도 4, 5 척이 못되지만 단순한 방풍, 防潮의 돌담으로 보기엔 규모가 큰 편이어서 이를 장성이라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에는 그 후 여러 차례 수축되었다고 하므로 당초의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 파군봉 : 애월읍 하귀리 동쪽에 있는 조그만 오름으로 여몽 연합군의 김방경이 이끄는 부대가 김통정의 삼별초군을 격파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파군봉은 산세가 험준하지는 않으나 조망이 매우 좋아 바다로부터 상륙하는 적을 용이하게 감시할 수가 있어 삼별초는 이 곳을 전초기지로 이용하였다.
라. 월대(제주시 외도동) : 탐라의 시인, 묵객들이 달뜨기를 기다려 시흥을 돋우었다는 명소로 지형이 반달 같아 붙여진 이름. 이 월대를 朝貢浦라고도 부르는데 탐라 도민이 나라에 바치는 공물을 김통정이 교통이 편리한 이 곳으로 가져오게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 살마진돌(살맞은 돌 또는 화살맞은 돌) : 속칭 김통정 활돌이라 하며 삼별초 군사들이 궁술 연마를 위하여 과녁으로 삼았다고 알려진 바위 유적. 항파두성 남문에서 서쪽으로 약1km 거리에 있는 극락봉 기슭에서 이 바위를 표적으로 쏘았는데 7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화살이 꽃혔던 자국이 남아 있다.
동아일보 1976년 10월 21일자에 실린 고성리 문창희 옹(1976년 당시 71세)의 말에 의하면 『새끼 손가락 만한 철촉이 이 바위 틈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지. 여러 사람들이 모두 뽑아보려 했으나 안 빠져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20여 년 전 외지에서 온 엿장수가 빼가 버렸어』라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높이 3 m 너비 2m 가량의 널찍한 바위 한 가운데 깊숙한 구멍이 패여 있다. 화살이 꽃혀 있었다는 자리로 깊이가 45cm나 된다.
바. 장수물 : 김통정의 전설이 얽힌 유적지로 흔히 장수물 또는 장수 발자국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종 14년(1273년) 여몽 연합군과 삼별초간에 항파두성 공방전이 벌어졌을 때 김통정이 토성 위에서 뛰어 내린 발자국이 바위에 파였고 그 곳에서 샘이 솟아나게 되었다고 전한다. 현무암 암반 중앙에 가로 40cm, 세로 60cm, 깊이 20cm 정도로 마치 거인의 신발 자국처럼 파였는데 이 석간수는 사철 마르지 않아 약수로 알려지고 있다.
이 외에도 옛 옹성 안에 성안 건물의 초석이었던 ‘돌쩌귀’가 있고, ‘구시물’ ‘옹성물’이 있는데 삼별초의 병사들이 음료수로 이용하였다고 전한다. 예전 제주도에 호열자(콜레라)가 만연하였을 때 고성리 사람들은 한 사람의 환자도 발생하지 않아 이 물을 마신 사람은 장수한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모개남밭·옥터·창고·와굴 등의 터가 이제는 지명이 되어 전해온다. 지금의 항파두성은 1977년에 복원한 것으로 면적이 9천여 평에 달하며 경내에는 항몽순의비가 세워져 있다. 지방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는 항몽 유적지는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에 위치하고 있다.
● 참고문헌
① 濟州道, 『濟州道誌』第一卷, 1993. ② 濟州道敎育硏究院,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耽羅의 敎育遺産』,1983. ③ 金奉玉, 『濟州通史』, 1987. ④ 金庠基,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對하여>,『東方文化交流史論攷』, 乙酉文化社, 1948. ⑤ 曺康煥, 『歷史의 古戰場』, 三潮社, 1977. ⑥ 高信子, < ‘삼별초’ 최후의 抗蒙근거지>,『역사산책』제6호, 범우사, 1991 . ⑦ 高昌錫, <歷史時代의 文化遺蹟>,『제주의 문화유산』, 한국이동통신제주지사, 1994.
|
'제주큰동산 역사뜨락 > 제주도 향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4. 불탑과 부도 - 불탑사 5층 석탑(원당사지 5층 석탑), 존자암 석종형(石鐘型) 부도 (0) | 2013.09.20 |
---|---|
[스크랩] 3. 고려 시대 문화유산 - 복신미륵(福神彌勒) (0) | 2013.09.20 |
[스크랩] 제8절 고려 시대 탐라의 문화 유산 1. 문경공 고조기 묘 (0) | 2013.09.20 |
[스크랩] 2. 목축업 3. 수산업 (0) | 2013.09.20 |
[스크랩] 제7절 탐라의 산업 1. 농 업 (0) | 2013.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