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화산 활동
고려시대의 탐라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화산 활동이 있었다. 《高麗史》五行志에 의하면,
목종 5년(1002) 6월에 「탐라에서 산이 4개의 구멍이 뚫어지며, 붉은 물이 흘러나오다가 5일 만에 멎었는데, 그 물이 용암이 되었다」고 했으며,
목종 10년(1007)에도 「탐라의 바다 가운데에서 상서로운 산이 솟아 나왔으므로 태학박사 田拱之를 보내어 이것을 시찰시켰는데, 탐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날 때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날이 캄캄해지면서, 우뢰와 같은 진동이 일어난 지 무릇 7일 만에야 날이 처음 개었다. 그리고 산의 높이가 백여 발이나 되고 주위는 40여 리 가량이 되며, 초목은 없고 연기만 자욱이 덮였는데, 바라본 즉 石硫黃 같으며, 사람들이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田拱之가 자신이 직접 그 산 밑까지 가서 산의 형상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서 왕에게 드렸다. 이 무렵에는 육지의 여러 지방에서도 지진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와 같은 두 차례의 화산 활동 기록은 《世宗實錄地理誌》, 《東國與地勝覽》(조선 성종때), 《耽羅誌》(1653) 등에 전승되어 오다가 《耽羅紀年》(1918)과 《南槎錄》(1602) 및 충암 김정의 牛島歌(南槎錄)와 최부(조선 성종때)의 耽羅詩(南槎錄) 등에 의하여 와전되면서 그동안 그 위치에 대하여우도, 군산, 비양도 등이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보고서들은 송악산을 주로 거론하고 있다.
● 참고문헌
①『高麗史節要』 穆宗5年 6月條와 同王 穆宗10年 10月條
②『高麗史』列傳 田拱之, 五行志
③ 建設部 國立地理院, 『韓國地誌』(地方篇 IV), 1986.
6. 탐라의 교육
고려시대의 탐라의 교육 제도와 상황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사실이 밝혀져 있지 않다. 더욱이 고려 시대의 제주는 삼국 시대 및 통일 신라 시대를 거치는 동안 유교·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사회 전반에 걸쳐 분명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빈곤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자료와 문헌들이 대부분 전하지 않아 그 실상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고려조에 계속된 조공의 부담, 삼별초의 난, 여러 차례의 민란과 병란, 원에 의한 경제적 수탈, 탐관오리의 횡포 등으로 인하여 당시 교육과 관련한 제주의 사회적 환경은 매우 열악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성종 11년(992) 4월 고려에서는 중앙에는 전국 유일의 국립대학인 국자감,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을 장려하였으나 당시 탐라에는 이러한 교육기관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이러한 형편에서 제도권 안에서의 정상적인 교육 활동을 기대하기란 힘들며, 비록 교육 활동이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일부 특권 계층의 몫이었을 것이며 일반 주민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려시대 탐라의 교육은 독자적인 경제적 기반과 무력, 지배 기구를 갖고 있었던 성주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특권층에 한하여 행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성종 때 「여러 고을에 있는 자제를 선발하여 경도에 유학하여 학습시켰다(諸州郡縣選子弟留京習業)」라는 기록을 볼 때 탐라의 경우도 성주계급 등 일부 특권층의 자제가 개경에 유학하여 교육을 받고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으나, 학문적 전통이 매우 열악하여 극히 소수의 급제자만을 내는 엄격한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탐라의 경우 정식 과거를 통한 급제라기보다는 번국에 대한 위무정책적 차원에서 賓貢 등의 형식을 빌어 급제자를 배출시키는 정책이 취해지는 등 특별한 배려가 행해졌다. 즉 정종 11년(1045) 高維의 南省試 합격과 禮部試 합격, 예종 2년(1107) 高兆基의 禮部試 합격, 원종 2년(12 61) 高適의 禮部試 합격 등이 그것인데 이는 탐라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특권 계층의 교육 상황을 엿보게 한다.
특히 高維와 高兆基가 최충의 문헌공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과 과거의 시험관이었다는 사실은 탐라에서 이루어졌을 교육 활동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高麗史》選擧志 科目條에 의하면 1071년(문종 25)에는 「秘書少監 高維가 75명을 뽑았다」고 하였고, 1148년(의종 2)에 「高兆基가 知貢擧가 되어 柳廷堅 등 25명에게 급제를 주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高維나 高兆基가 과거 시험관이 되어 급제자를 뽑았다는 사실과 고려 중기에는 지공거 출신이 설립한 私學이 크게 번성하고 있었던 점, 그리고 지공거를 역임하여 직접 급제자를 뽑았던 高兆基의 묘가 현재 제주도에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제주도에서도 그들의 영향으로 인한 교육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실정이다.
고려조 탐라에서의 사회 교육은 본질적으로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의 2대 국가적 행사 가운데 하나였던 팔관회의 참가와 팔만대장경판을 만드는데 목재로서 후박나무를 완도, 거제도, 울릉도와 더불어 제주도에서도 제공했었기 때문에 그러한 유추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팔관회에 탐라인으로서 정종의 즉위(1034)를 축하하고자 성주의 직분으로 高維가 참가한 바 있는데, 정종 11년(1045)에 그가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팔관회나 대장경 제조는 단순한 신앙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결속을 강화시키는 주요한 사회 교육적 기능이 다분하였던 일련의 교육적 행사이기도 하였다. 비록 탐라가 이러한 행사에 미미한 관여 밖에는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강력한 사회 교육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제주도에 불교가 언제 들어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고려 시대의 탐라에는 존자암, 수정사, 원당사, 법화사 등 많은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사찰은 신앙 행위로서의 예배와 수도 및 설법이 승려나 불교 신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사회 교육 기관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탐라의 사찰은 제주 교육사에 있어서 생명력이 가장 오래된 사회 교육 기관이라 하여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 참고문헌
① 濟州道, 『濟州道誌』第三卷, 1993.
② 康錫奎 , <耽羅-近代의 濟州鄕土敎育 >『康錫奎停年退任 記念論文』, 全南大學校 出版部 , 1994 .
③ 『高麗史』選擧志 科目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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