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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5. 법화사지 - 법화사의 창건과 변천

제주큰동산 2013. 9. 20. 21:09

 

5. 법화사지

 

가. 법화사의 창건과 변천

 

  법화사는 일반적으로 고려 후기 제주 지방의 대표적 사찰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에 있으며, 제주도 지방기념물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1960년경 寺址 일대에 있던 초가를 헐고 절을 재건하기 위하여 정지작업을 하던 중 절터 및 나한전 자리의 주초석과 섬돌들이 발견됨으로써 그 규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창건 연대가 통일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는 의견도 있으나, 그 창건 연대를 알 수 있는 사적이나 문헌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법화사의 편년은 10~12세기경에 창건되어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 14~16세기에 절정기를 이루다가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러 문헌 기록을 토대로 미루어 이 사찰이 重創된 시기는 원의 탐라총관부가 제주에 설치된 충렬왕 원년(1275) 이후의 일로 생각된다.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기와의 명문 중에「始重創十六年己卯畢」에 대한 해석은 至元 16년 기묘 즉, 고려 충렬왕 5년(1279)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법화사가 元의 탐라총관부가 설치되기 이전 언제인가 창건되어 있다가 탐라총관부가 설치되면서 제주에 대한 정치적 비중이 변화됨에 따라 1279년 법화사도 중창되어 더욱 교세를 떨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후 태종 6년(1406)에 법화사에 안치되었던 아미타삼존불상을 명에게 넘겨 준 후 계속된 억불책에 의하여 교세가 약화되어 갔다. 이와 관련한 기록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明의 사절이 조선에 와서 이르기를, “제주 법화사에 있는 아미타삼존은 원나라 良工이 만든 것입니다. 저희들이 곧바로 가서 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하여 아미타삼존불의 인도를 요구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나주로 옮겨 명의 사절에게 인도하였다. 이로써 볼 때 법화사는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유명사찰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불상을 인도할 때 감실(龕室:불신을 안치하는 장 또는 불단) 15개를 만들어 불상·화광·연대·좌구를 나누어 담고, 모란·자약·황규 등 기이한 꽃들을 흙을 담아 심었는데 그 궤를 만드는데 판자가 1천 장, 철 6백 근, 백지 2만 8천 장, 면화 2백 근을 사용하였고 擔夫가 수천 명 동원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太宗實錄》8년 2월 정미조에 의하면, “법화사는 대정현 하원에 있었던 절로 당시 비보사찰로 노비만도 280인이나 있는데 1408(태종8)에 의정부에서 아뢰어 제주목 수정사 노비 130인과 함께 각각 노비 30인만 주고 나머지는 모두 전농사에 귀속시켰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법화사는 가장 큰 비보사찰로 유지되어 오다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이원진이 탐라지를 기록할 즈음(1653년)에 폐사되었다.

 

 

사진 : 법화사, 제주큰동산, 2010.11.14.15:52,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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